[오늘과 내일/김용석]지정학 리스크까지 넘어야 할 위기의 한국기업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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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사이 생존 압박 받는 韓 기업
시장 빼앗길 위기 넘을 활로 찾아야

김용석 산업1부장
김용석 산업1부장
화유코발트라는 중국 회사가 있다. 2차 전지 핵심 소재 코발트를 생산한다. 창업자인 천쉐화(陳雪華) 사장이 콩나물 행상으로 시작해 이 분야 세계 1위 기업을 키운 스토리는 눈물겹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기회를 찾은 천 사장은 2004년부터 코발트 광산 확보에 매달렸다. 이어지는 내전으로 대다수 외국자본이 민주콩고를 떠날 때도 낮에는 정부군, 밤에는 반군 눈치를 살피며 십수 년을 버텼다. 전기자동차용 2차 전지 핵심 소재로 코발트 가치가 급등하자 전 세계 전지업체가 줄을 서는 1등 기업으로 뛰어올랐다.

여기까지는 끈기로 이뤄낸 아름다운 성공 스토리다. 하지만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얘기가 달라진다. 민주콩고의 아동노동 실태가 알려지며 화유의 코발트는 ‘더티 메탈’이 됐다. 아동노동 착취로 화유가 소송을 당하자 거래를 꺼리는 기업이 늘어났다.

친환경, 사회적 책임, 지배구조 개선을 뜻하는 ‘ESG 경영’이 강조되면서 미국·유럽 기업들은 ‘클린 메탈’ 사용을 입증하지 않으면 납품을 받거나 투자를 해주지 않겠다며 문턱을 높이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 2차 전지 기업들은 대안 물질을 개발하거나, 비싼 호주 광산 코발트를 써야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클린 메탈만을 받아 준다는 선진국의 높은 문턱을 ‘사다리 걷어차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아동노동과 환경오염 원조 격인 1차 산업혁명 국가들이 자기가 걸어 올라온 사다리를 치워 후진국을 따돌린다는 비판이다. 기업들은 이런 현상이 미중 패권 전쟁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본다. 핵심 소재와 산업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는 게 속내라는 얘기다.

문제는 한국 기업들이 사다리 어디쯤에 있는지다. 비용을 감수하고 기술을 혁신해 시장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숙제를 떠안았다. 하지만 여전히 화유와의 관계도 끊어 버릴 수 없는 현실이다. 낮에는 미국·EU와 ESG 콘퍼런스를 하다가, 밤에는 화유와 술잔을 기울여야 하는 처지. 경영자들은 “ESG는 고상한 선(善)의 실현이 아니라 손바닥이 까지도록 사다리에 올라타야 하는 생존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토로한다.

시장 문턱 높이는 데 ESG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다. 국가 안보를 이유로 노골적인 밥그릇 빼앗기도 진행된다. 반도체가 대표적이다. 한국 삼성전자와 대만 TSMC가 양분하는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진출을 선언한 미국 인텔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는 “세계 반도체 80%를 아시아가 독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CEO 한 명의 도발이 아니다. ‘21세기 편자의 못’인 반도체를 미국에서 만들어야 한다고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선언한 이후 인텔이 시장에 진출했고, IBM과 MS가 힘을 보탰다. 아마존, 시스코, 퀄컴도 인텔을 지지했다. EU도 ‘반도체 탈아시아’를 천명하며 180조 원을 쏟아붓는다.

한때 한국 기업이 미국·일본의 기술 경쟁력과 중국의 가격 경쟁력 사이에 낀 ‘넛 크래커’ 신세라는 분석이 있었다. 위기감이 컸다. 하지만 열심히 달리면 솟아날 구멍이 보였다. 기술에 투자하거나 생산기지 이전 또는 혁신을 통해 비용을 낮추는 방법이었다.

반면 복잡한 지정학적 리스크에 발목 잡힌 지금 위기는 한층 더 답답해 보인다. 시장의 변화를 따르되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기민하게 대응하는 기업과 정부의 파트너십이 발휘돼야 한다. 역대급으로 벌어져 있는 기업과 정부의 시각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다면 우리 미래는 깊은 상처를 입을 것이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
#지정학 리스크#한국 기업#미국#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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