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후드가 간과한 투자의 냉엄한 이치[광화문에서/유재동]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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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뉴욕 특파원
유재동 뉴욕 특파원
요즘 월가에서 자주 회자되는 스토리가 있다. 칼 아이컨과 빌 애크먼의 장장 5년여에 걸친 대혈투다. 아이컨은 2006년 KT&G의 적대적 인수합병 시도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전설적 투자자이고, 애크먼도 ‘리틀 버핏’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헤지펀드계 거물이다. 둘 다 요즘 이슈인 공매도 투자의 대가라는 공통점도 있다.

전쟁은 2012년 말 애크먼이 건강식품 판매회사인 허벌라이프를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이 업체는 판매원들로 하여금 새 판매원을 모집해 매출을 내도록 하고 성과급을 나눠 줬는데 이게 전형적인 피라미드 방식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 회사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며 무려 2000만 주에 달하는 공매도를 걸었다. 일단 주식을 빌려 판 뒤, 예상대로 주가가 하락하면 싸게 사서 되갚는 방식으로 차익을 거둘 계획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이컨이 “허벌라이프는 좋은 회사”라고 맞서면서 애크먼과는 반대로 이 회사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큰 손실을 볼 수밖에 없는 외나무다리 싸움이 된 것이다. 그 후 개인적 관계도 틀어진 두 사람은 뉴스 생방송에서 서로를 욕하고 헐뜯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긴 싸움은 2018년 초 애크먼이 수억 달러의 손실을 본 채 공매도를 청산하며 결국 끝이 났다. 허벌라이프의 꾸준한 실적 호조와 주가 상승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한쪽은 기업에 문제가 있다는 데, 한쪽은 멀쩡하다는 데 돈을 걸었다. 선악의 구분은 없었다. 공매도를 한 애크먼과 이에 맞선 아이컨 모두 돈 앞에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투자자였다. 그저 기업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면 이익을 내고, 잘못 판단하면 손실을 본다는 엄연한 이치만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기업의 옥석이 가려졌고 필요한 자금이 적시에 공급되는 금융 본연의 기능이 작동했다. 피라미드라는 지적을 받은 허벌라이프도 판매원 모집 방식 등 사업 모델을 개선하면서 시장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최근 미국에선 공매도 세력인 월가에 맞서 로빈후드 개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게임스톱 사건’이 뉴스의 초점이 됐다. 처음에는 힘없는 개미들이 똘똘 뭉쳐 골리앗을 쓰러뜨렸다는 박수가 쏟아졌지만, 사실 이 사건의 결말은 처음부터 예정돼 있었다. 개미들이 월가를 혼내주는 과정에서 딱히 유망하지도 않은 기업 주가가 달나라까지 치솟더니 이내 곤두박질쳤고, ‘반란’에 뒤늦게 가담한 개미들만 큰 피해를 봤다. ‘공매도는 악(惡)이고, 이에 대항하는 것은 선(善)’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이 반드시 투자 성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입증해준 것이다.

일부 개미들의 집단행동에서 비롯된 이 사건은 어느새 기득권에 대항한 정치 투쟁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최근 한국의 공매도 금지 연장 조치도 1000만 개인투자자의 표를 의식한 결정이 아니냐는 의심이 나오고 있다. 개미들에게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고, 양극화에 고통받는 청년 세대들의 분노를 이해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기본적 경제원리를 무시하고 세상을 네 편 내 편으로 가르는 식이라면 투자의 성과도, 올바른 대책도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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