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 번영의 명암[동아광장/박상준]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입력 2021-02-06 03:00수정 2021-02-06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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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 이면에는 실패에 가혹한 문화
美사회문제 자살률과 빈부격차 증가
바이든 과제는 분열된 미국 치유
분열과 갈등으로 몸살 앓는 한국사회
실패 보듬는 공동체 역할 되살려야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나는 1992년 미국 중서부에 있는 한 대학의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인구 20만 명 규모 소도시는 중서부의 대학도시가 으레 그렇듯 조용하고 지루한 곳이었다. 미국치고는 큰 사건사고가 별로 없는 곳이었지만 그 작은 도시에도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과 상대적으로 위험한 곳, 백인이 많은 지역과 흑인이 많은 지역이 있었다. 나는 기혼자를 위한 대학 기숙사에 살았는데, 그 기숙사 가까운 곳에 백인이 주로 사는 고급 주택가가 있었다. 숲으로 둘러싸이고 호수에서 멀지 않은, 쾌적하고 깨끗한 곳이었다.

기숙사가 꽤 큰 단지를 이루고 있어서 사방으로 길이 나 있었는데, 나는 밖으로 나갈 때면 굳이 고급 주택가가 있는 쪽으로 차를 몰았다. 깨끗하고 아늑한 숲길에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었다. 어느 해 봄 평소처럼 차를 몰고 그 주택가를 지나는데, 곳곳에 장미로 장식된 입간판이 서 있고, “봄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꽃향기를 맡으며 천천히 운전하세요”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나는 금방 그 말의 속뜻을 알아챘다. 과속은 위험하니 속도를 줄이라는 부탁이었다. 기숙사에 사는 학생들은 늘 바빴고, 아마도 과속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나 같은 학생 때문에 골머리를 썩다가, 대학에 항의하거나 경찰에 고발하겠다는 경고문을 거는 대신 내놓은 참신한 해결책이었다. 그 여유와 너그러움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나는 그 나라를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가난한 유학생이었지만, 나 자신을 여유롭고 부유한 백인과 동일시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호수가 보이는 고급 주택에서 살 수 있는 나라, 그것이 젊은 내게 비친 미국의 모습이었다. 젊은 패기였을까. 실패하면 슬럼에서 살아야겠지만, 성실히 노력하는 한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그의 취임식 연설에서 미국을 정의하는 첫 단어로 ‘기회’를 들었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늘 듣던 말이다. 미국은 기회의 나라다. 자기만 성실하다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기회의 나라이기 때문에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은 개인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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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미국은 실패자에게 가혹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두드러지는 빈부격차, 증가하는 자살률은 우연이 아니다. 대부분 선진국에서 감소하는 자살률이 미국에서는 증가하고 있다. 특히 40, 50대 중년 백인 남성의 자살률이 눈에 띄게 증가했는데, 제조업 쇠퇴로 인한 고용 악화를 원인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좋은 직장을 가지면 비싼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고, 시간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의사와 면담할 수 있다. 직장을 잃으면 보험도 잃고 열악한 환경의 보건소에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지만, 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더 극심한 상대적 빈곤을 경험한다. 올해 1월 한 무리의 백인들이 의사당에 난입한 사건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적 여유를 빼앗긴 백인들은 너그럽지 않았다.

나는 젊은 시절, 미국식 번영에 매료되어 그 뒤에 숨은 그늘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는 나도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었다는 것과, 그래서 실패자에게 냉정한 사회가 얼마나 끔찍할지를 나이가 들어서야 깨닫고 있다. 내가 만일 한국의 평범한 가정,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님이 있는 가정이 아니라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와 책임감 없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면, 꿈을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삶 자체가 버거웠을지도 모른다. 나보다 더 우수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이들이 있었고,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생의 경로가 달라진 이를 보기도 했다. 누구라도 실패자가 될 수 있는 세상에서, 실패는 오직 네 책임이라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바이든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미국이 가진 강점뿐 아니라 미국이 가진 약점, 빈부격차와 그로 인한 분열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치유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기보다는 실패한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겠다는 말일 것이다. 같은 고민이 한국에도 필요하다. 경제적 번영의 그늘에 숨은 빈부격차의 심화, 그리고 그로 인한 분열은 이제 한국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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