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지시는 ‘면죄부’가 아니다[오늘과 내일/정연욱]

정연욱 논설위원 입력 2021-01-19 03:00수정 2021-01-19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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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지시나 발언 계기로 탈법·편법 난무
절차적 정의 유린은 法治 근간 흔드는 폭력
정연욱 논설위원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불법 출국금지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2019년 3월 당시 긴급 출금 요건을 어긴 정황이 속속 드러나자 추미애 법무부는 “법리 오해와 사실 오인”이라고 반박했고, 친문 인사들까지 가세했다. 법무부와 일부 검사들이 가짜 서류를 작성하고 출금을 승인한 경위만 따지면 될 일인데 다시 정치 공방으로 번질 모양새다. 윤석열 검찰이 출금 논란에 대해 전면 재조사에 착수한 것이 불씨를 지핀 듯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건 발생 닷새 전 김학의 사건에 대해 ‘조직의 명운을 걸고 책임지라’고 강조했다. 당시 검찰 과거사진상조사단에 참여해 김학의 사건을 맡았던 재심 전문 변호사도 “문 대통령 지시 이후 활동기한 연장이 없다던 과거사위원회가 입장을 번복했고, 김 전 차관 출국 금지는 근거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 어느 부처보다 치밀하게 법적 절차를 따져야 할 법무부가 뻔히 논란이 예상되는 대응을 불사한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재인 정권에서 대통령 메시지가 태풍으로 번진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청와대의 2018년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 과정에서도 등장했다.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을 수사한 검찰의 공소장에는 “현직 대통령 30년 지기의 당선을 위해서”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문 대통령이 야당 시절인 2014년 울산 국회의원 보궐선거 유세에서 “내 가장 큰 소원은 송철호의 당선”이라고 했을 만큼 두 사람 인연은 각별했다. 정치적 후각이 탁월한 청와대 참모들이 대통령 메시지의 함의를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송 시장 당선을 위해 대통령비서실 7개 조직 등이 움직인 연원에는 대통령의 한마디가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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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원 감사 결과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에 불을 붙인 것도 “영구 가동 중단이 언제 결정되느냐”고 던진 문 대통령의 한마디였다. 이 발언이 전해지자 당초 조기 폐쇄에 미온적이던 산업통상자원부는 경제성 평가를 조작해 조기 폐쇄를 밀어붙였다. 감사원 감사가 진행되자 산업부 공무원들이 휴일 심야에 ‘탈원전 주요 쟁점’ 등 444개 파일을 삭제한 사실도 드러났다. 그 누구보다 상명하복(上命下服) 위계질서에 민감한 공직자들이 이런 무모한 일을 자발적으로 하진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대통령 지시는 남다른 초법적 무게를 갖는다. 더욱이 청와대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청와대 정부’에서 발신하는 대통령 지시나 발언은 정부 부처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해내야 하는 어명(御命)이나 마찬가지다. 기세등등한 정권 초반이면 그 무게감은 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적과 동지’ 구분이 된 순간 대통령 지시는 가차 없는 돌격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이렇다 보니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는 공직사회의 신중함은 철저히 무시됐다. 절차적 하자나 탈법 정황이 드러나도 여권은 선출 권력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음모라고 맞불을 놓기 바쁘다. 특히 탈원전 등 대통령 공약 이행은 불가침의 영역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그러면서 과거 야당 시절 이전 정권의 4대강 공약을 집요하게 반대한 것에 대해선 별다른 언급이 없다. 이런 ‘내로남불’도 없을 것이다.

목적이 정의롭다고 해서 어떤 수단도 정당화될 순없다. 그 수단도 적법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런 절차적 정의를 지키는 것이 법치주의의 근간이자 핵심이다. 더 이상 대통령 한마디가 최소한의 절차적 정의는 무시해도 된다는 나쁜 선례(先例)를 남겨선 안 될것이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김학의 사건#김학의 출국금지#대통령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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