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영과 민중가요의 아이러니[임희윤 기자의 죽기 전 멜로디]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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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탈리아에서 공연하는 캐나다 로커 닐 영. 컨트리와 록, 목가적 정서와 반항적 메시지를 결합해 그런지(grunge)의 초석을 쌓았다.
2008년 이탈리아에서 공연하는 캐나다 로커 닐 영. 컨트리와 록, 목가적 정서와 반항적 메시지를 결합해 그런지(grunge)의 초석을 쌓았다.
임희윤 기자
임희윤 기자
“F*** you, I won‘t do what you tell me!”(‘Killing in the Name’ 중)

얼마 전 음악 팬들 사이에서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가두시위 영상 하나가 화제가 됐다.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 일부가 록 밴드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RATM)’의 노래를 틀어놓고 그 리듬에 맞춰 열정적으로 성조기를 흔드는 장면이다. 할아버지까지 따라 부르던 그 노래는 ‘Killing in the Name’.

웃음 포인트는 아이러니다. RATM은 미국을 대표하는 좌파 밴드다. 1996년 2집 ‘Evil Empire’를 내며 제시한 함께 읽으면 좋을 참고도서 목록에 마르크스, 체 게바라, 놈 촘스키 등의 책을 포함했다. 대부분의 곡에서 자본과 미디어의 독재와 왜곡에 대한 분노를 다룬다. ‘××, 너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거야!’라 외쳐대는 저 ‘Killing in the Name’은 그들의 대표곡이다.

#1. 캐나다 출신 싱어송라이터 닐 영(75)이 최근 트럼프에게 제기한 소송을 취하했다. 법정 밖에서 어떤 합의나 화해가 이뤄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영은 트럼프 캠프에서 선거운동 배경음악으로 자신의 ‘Rockin’ in the Free World’(1989년)와 ‘Like a Hurricane’을 무단 사용했다며 올 8월 소송을 걸었다.

#2. 영의 음악세계는 그의 ‘아재’적 외모나 몇몇 히트곡 때문에 오독되기 일쑤다. 4인조 슈퍼그룹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앤드 영’의 포크 록이나 ‘Heart of Gold’ ‘Harvest Moon’의 목가적 서정성 같은 영의 첫인상은 그를 대표할 수 없다. 영은 소닉 유스, 너바나, 펄 잼에게 큰 영향을 끼치며 ‘그런지의 대부’로도 불린다. 이를테면 1990년 앨범 ‘Ragged Glory’ 수록곡 ‘Fuckin‘ Up’ 같은 곡을 들으면 그의 밴드 이름이 왜 ‘Crazy Horse(미친 말)’인지 알 수 있다.

#3. ‘Rockin’ in the Free World’는 당시 조지 부시 행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프리 월드’, 즉 자유세계라는 가사 때문에 되레 우파 지향의 애국 송가로 잘못 불리기도 한다. 트럼프 캠프는 2015년 대선 때도 이 곡을 사용했다가 영과 마찰을 빚었다. 카우보이모자에 기타를 든, 성깔 있어 보이는 인상의 배불뚝이 아저씨. 이른바 레드넥(미국 남부 가난한 백인)이 좋아할 만한 컨트리의 색채를 품은 이미지, ‘그 옛날 내가 좋아하던 노래’라는 향수로 치면 아마도 트럼프 캠프에 매혹적일 수도 있겠다.

#4. 노래가 사회 이슈와 결합되는 순간은 대개 원작자의 의도와 상관없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이나 ‘친구’가 처음부터 의문사한 대학생의 시신과 함께 놓여 있던 것은 아니듯이.

몇 년 전, 대학교 시위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여학생들이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불러 화제가 됐다. 상전벽해. 근래 홍콩과 태국의 시위 현장,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분쟁 현장에서 약속한 듯 케이팝이 등장했다.

#5. 민중가요는 변화한다. 수많은 사람이 제창했던 노래는 언젠가, 어떤 뜻밖의 뜨거운 현장에서 소환되게 마련이다. 노래는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슈퍼파워를 지녔다. 스타디움에서, 대형 록 페스티벌에서 수만 명이 한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음악 팬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기이하고 영적인 체험이다.

#6. ‘Rockin‘ in the Free World’ 이후 20년 뒤, 선거 운동장에서는 또 어떤 노래가 울려 퍼질까. 어쩌면 레이디 가가의 성소수자에 대한 송가 ‘Born This Way’가 백인 우월주의자의 새로운 민중가요로 재해석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7.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홀로코스트와 전범 재판 이후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는 누더기다. 미움과 차별의 목소리가 오프라인과 온라인에 넘쳐난다. 눈 뜨고 보기 힘든 혐오의 말은 새로운 멋진 세계, 웹 월드에서 더더욱 독한 방향으로 ‘역진화’ 중이다.

#8. 그래도 지구의 어두운 면에서는 오늘밤에도 아주 오래된 자장가가 불릴 것이다. 아기는 내일도 태어날 것이다. 그들은 꿈을 꿀 것이며, 그 꿈은 끝내 거대한 환멸의 벽에 부딪힐 것이다. 지구는 돈다. 수십만 년 전처럼.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민중가요#닐 영#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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