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람의 시간[내가 만난 名문장]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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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균 작가·농부
공상균 작가·농부
‘시간은 코앞에서 흔들리는 탐스러운 엉덩이/올라타고 싶은 순간과 걷어차고 싶은 순간으로/뒤뚱거린다/돌멩이를 삼키는 거위처럼.’ ―유계영 ‘해는 중천인데 씻지도 않고’ 중

“보름 정도 황토방에서 묵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처음 전화를 받고 거절을 했다. 화개장터 가까운 곳에 좋은 펜션이 있으니 장기 숙박하기에는 거기가 편할 거라며 소개했더니, 꼭 우리 집에 오겠단다. 밤이면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암흑천지에 여자 손님을 혼자 두고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마음이 쓰일 것 같기도 했고, 혼자 무료하게 보낼 서울 사람의 시간을 먼발치서 바라보기에는 농부에게 바쁜 계절이기도 했다. 몇 번의 거절에도 굳이 오겠다는 마음이 고마워 끝내 허락하고 말았다. 보름 동안 지낼 짐치고는 가벼운 가방 두어 개를 들고 은영 씨가 집에 오던 날, 바람이 제법 불었고 냇가에는 찔레꽃이 피어 향을 토했다. 바람에 실린 찔레 향을 맡을 수 있을까, 빨간 그네에 앉아 책이라도 읽으면서 스르르 낮잠이라도 잘 텐가, 건너 차밭에서 찻잎을 따며 수군거리는 농부의 아내들 수다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라도 날 텐가, 온갖 추측을 하면서, 보름 동안의 서울 사람 시간이 무료하지 않기를 바랐다.

내 염려를 알기라도 한 듯, 은영 씨는 무료하지 않게 보름을 지내고 돌아갔다. 아침 일찍 일어나 노고단에 다녀오기도 했고, 친구를 불러 마당에 저녁상을 차리기도 했다. 업무 e메일을 전송하며 여행 중 근무를 즐기는 모습에서, 30대 직장인의 여유를 보았다. 젊은 시인 유계영이 쓴 시를 읽었다. 시간이 ‘코앞에서 흔들리는 탐스러운 엉덩이’란다. ‘올라타고 싶은 순간과 걷어차고 싶은 순간으로 뒤뚱거린다’는 문장 앞에서 내 눈길 오래 머문다. 제목을 다시 읽는다. ‘해는 중천인데 씻지도 않고.’ 아하, 시인 앞에서 뒤뚱거리는 오리 엉덩이 같은 시간이 내 앞에도 얼쩡거린다. 올라탈 것인가, 걷어찰 것인가.

공상균 작가·농부
#유계영#해는 중천인데 씻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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