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특별한, 평범한 날들[내가 만난 名문장]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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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은 작가
정재은 작가
‘우리가 그 속에서 숨은 모과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평범이 특별함이다.’
 
―박연준 ‘모월모일’ 중

이 말에 끌려 산문집을 집어 들었다. 표지의 신비로운 보석처럼 생긴 것이 실은 매일 써서 닳아버린 비누란 것도 마음을 끌었다. 작가는 평범한 날들을 기리며 이 글들을 썼다. 잊어버려서 잃어버리는 것들로 가득한 날, 평범은 그런 것이다.

좋아하는 사진이 하나 있다. 오래전 티베트로 혼자 여행을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정리하다가 길 위에 놓인 배낭 사진을 발견하고는 잠시 멍한 얼굴이 됐다. 허허벌판에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언제 지나갈지 모를 차를 기다리던 일은 그 여행에서 팔 할을 차지했다. 특별한 경험을 위해 불안과 두려움, 지루함을 견뎌야 했던 시간들. 내가 묘한 감정이 되었던 건 내 배낭 옆에 놓여 있던 배낭 때문이었다. 옆에 놓인 배낭이 몹시도 생경할 만큼, 누군가와 함께였던 기억이 없었는데, 모험이라 불릴 만한 여행에서 불안도 두려움도 남지 않은 건 그런 존재들 덕분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만 믿었던 시간이 아니라, 그래서 내가 단단해져야만 한다는 강박에 짓눌렸던 시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존재에 의지하고 안도하며 용기를 내어 나아갔다는 깨달음.

‘안으로 조금씩 부스러지고 있던’ 작가는 자정이 가까운 겨울밤, 잠 못 이루고 혼자 걷다 우연히 만난 고양이 덕분에 ‘조금은 용기를’ 얻는다(‘밤과 고양이’ 중). 우리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배낭이나 한밤중 만난 고양이처럼 나와 상관없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에조차 용기와 위로와 위안을 얻으며 그렇게 평범한 날들을 지나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잊어버리지만 않는다면, 혹은 발견하기만 한다면, 삶은 따뜻하고 환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느 날 무심코 손을 씻다 보석처럼 빛나는 비누를 알아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정재은 작가
#박연준#모월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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