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민족주의를 향한 ‘오래된 미래의 길’

조광 국사편찬위원장 입력 2020-01-29 03:00수정 2020-01-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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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기고-다음 100년을 생각한다]<9> 조광 국사편찬위원장 지금 21세기 초입에 선 우리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 첨단 기술 정보들이 인간 생활의 각 분야와 융합되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와 직면해 있다. 지난 20세기 우리는 정보와 지식을 자본으로 한 3차 산업혁명을 경험했다. 이를 단숨에 넘어 4차 산업혁명은 인간 생활과 경제 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며, 그 변화와 발전의 흐름에는 가속도가 붙어 있다. 이 상황에서 인류의 오래된 역사 경험인 민족주의는 100년 후 우리 사회에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세계사는 19세기를 ‘민족주의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19세기에 이르러 민족주의는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 여러 곳에서 불꽃처럼 일어났다. 20세기 중엽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일부 연구자들은 민족주의의 약화 내지 소멸을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20세기에 있어서도 여전히 중요한 역사 현상이었다. 특히 민족주의는 독립을 추구하던 여러 지역에서 민족국가 형성의 동력을 강화시킨 이념이 되었다.

민족주의는 1990년대 탈냉전과 세계화의 열풍을 몰고 온 신자유주의의 발호 속에서 이미 시효가 끝났다고 주장되었다. 탈민족주의 이론은 민족주의를 파시즘과 같은 반역으로 단죄하며 그 소멸을 언도했다. 그러나 이는 오판이었음에 틀림없다. 민족주의는 21세기 정보화의 강화에 힘입어 지역을 초월한 민족적 연계와 결합을 오히려 강화해 갔다. 민족주의는 지금 제4차 산업혁명 단계에 있어서도 또 다른 자기변신을 통해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역사에는 유일한 법칙이 있다. 역사는 궁극적 차원에서 볼 때 발전한다는 법칙이다. 역사의 산물인 민족주의도 22세기를 향하여 변화와 발전을 거듭한다. 민족주의가 추구하는 대내외적 목표점은 자유, 평등, 형제애 그리고 정의와 평화가 정착한 국가의 완성에 있다. 역사는 이 지점을 향해 조금씩 발전해 간다. 물론 인간이 만드는 역사는 그리 녹록지 않으며, 완성을 향한 길은 결코 평탄치 않다. 그럼에도 오늘의 세계는 역사가 지향하는 목표점의 도달에 힘을 보태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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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나 민족주의는 역사학 또는 사회과학에서 매우 다양한 정의를 가지고 있어서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19세기 어떤 이들은 민족을 혈통이나 언어, 문화 등의 동질성을 기초로 하여 성립된다고 했다. 한편, 20세기 중엽 이후에는 민족이란 ‘함께 살고자 하는 의지’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민족은 ‘생동하고 활동적인 공동체 의지’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민족의 개념들을 기반으로 하여 각 시대의 요청에 따른 민족주의가 탄생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열정과 헌신을 요구하는 일종의 종교성이 있었다.

사실 민족은 역사의 산물이었다.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프랑스 혁명이 낳은 쌍둥이였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에서 요구하고 있는 혁명의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둘은 근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각자가 처한 역사적 조건에 따라 변모를 거듭해 갔다. 이 점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민족주의는 세계사적 보편성을 지님과 동시에 우리의 역사와 깊이 연결되면서 나름의 특수성을 가지게 되었다.

민족주의는 대외적으로 볼 때에는 국가의 주권 확립을 위한 노력이었고, 대내적으로는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를 바탕으로 하는 보편적 인권과 정의를 담보해 주는 민주공화주의의 실천으로 나타났다. 한국민족주의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산물이었고, 각 시대의 요청에 대응하여 이 대외적 요소와 대내적 요소를 선후적 또는 동시적 추진 과제로 판단하여 실천해 왔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의 독립된 국가 체제와 민주공화주의는 발전해 왔고, 발전해 가고 있다.

우리 근현대사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한국민족주의는 우선 저항민족주의의 특성을 가지면서 출현했다. 민족주의는 우리가 독립을 쟁취해 나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추진력을 제공해 주었다. 한편, 해방 이후 우리는 민족국가 건설을 눈앞에 두고 남북 분단과 민족 내전을 겪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자유와 평등의 보장을 통해 인권과 정의를 실현하려는 민주공화제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다.

남북은 21세기의 20년대에 접어든 오늘에도 분단을 극복하여 하나의 정치단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줄기차게 이어오면서, 민족통일이 신성한 의무임을 확인해 갔다. 남북한 모두가 민족을 떠나서는 통일을 위한 근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통일론은 분단 1세대에게 더욱 절박하게 다가왔고 이들을 중심으로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발전해 왔고, 민족주의도 그 발전상에 조응하는 자기혁신을 요구받게 되었다.

민족주의는 고정된 실체라 하기보다는 늘 변화 발전을 거듭하는 역사적 생명체다.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탄생시킬 수 있는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이 소중히 간직해야 할 역사적 자산이다. 남북한 모두가 통일을 숙원 과제로 삼고 있는 이상 분단 극복, 민족 화해, 통일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민족주의를 극복의 대상으로만 볼 수 없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과잉은 민족 구성원에게 횡액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의 민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성 내지는 문제점을 검토해야 한다. 이 검토를 통해서 민족주의는 100년 후의 미래를 여는 의미 있는 길을 제시해 주리라 생각된다.

지난날 남한의 경우, 민족주의는 국가주의적이며 집단주의적 특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것이 지배층의 권력 강화 수단으로 오용되어 지배층과 민중 사이의 간극을 넓히는 기능을 해 왔다. 또 남한의 민족주의는 해방 이후 남한이 이룩한 자그마한 성취에 자만하여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민족은 상상된 정치공동체’라는 특수 이론을 한국의 역사 현실에도 적용하여 민족주의를 오도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북한의 경우에도 어느 다른 나라 못지않게 강렬한 민족주의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민족이론은 단일한 혈통을 강조한다. 또한 그 혈통은 고대사회에서부터 존재해온 실재로서 그 양적 확대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혈통이란 친족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확인할 수 없는 범주이다. 혈통에 집착하는 한, 그것은 ‘단일하거나 순수한 혈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형질인류학의 지식에 대한 도전이다. 또한 우리는 지구상에 다수 존재하고 있는 다인종으로 구성된 민족국가의 존재를 애써 도외시할 수 없다.

한편, 현대 남한의 경우는 인구 구성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지금 우리 이웃에는 전체 인구의 4%를 웃도는 200여만 명의 이주노동자나 결혼이민자가 있다. 우리는 이미 다문화사회에서 살고 있다. 오늘의 세계사는 인간의 기본권인 ‘거주 이전의 자유’가 국경을 무너뜨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상황에서 혈통에 입각한 ‘민족의 순결성’을 논하는 일은 비인간적이며 반역사적이다. 여기에서 민족 내지 국민에 대한 재개념화 작업이 요청되고 있다. 그래서 민족은 원래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문화적 실체임을 확인하면 된다.

민족주의는 역사 발전의 건전한 에너지다. 동시에 이는 분란과 전쟁을 일삼는 파괴적 기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민족주의는 인종주의나 자민족중심주의의 형태로 변질되어 인류 역사에 재앙이 되었던 터였다. 비이성적 국수주의는 결국 자기파멸의 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민족주의가 근본주의 경향을 가지게 되면 지구는 시끄러워지고 평화는 멀리 달아난다.

동시에 우리는 민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건강한 추동력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민족주의는 대외적으로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자신들의 국민국가를 향유하게 했다. 또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쌍둥이 형제라고 했다. 민주주의가 없는 민족주의는 사기일 뿐이다. 자주와 민주를 함께하는 열린 민족주의는 우리의 미래이다. 이를 통해서 역사는 발전한다.

민족주의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인권이 보장되는 민족국가,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가 넘치는 새로운 나라를 향해 거침없이 전진해 나간다. 이제 분단된 남북의 겨레는 지겨운 다툼을 그치고 인류가 존중하는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며, 공동발전을 가속화해야 한다. 이를 향한 투신이 있는 한, 100년 후인 2120년도 전후 우리 사회에서도 오래된 미래인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추동력을 발휘할 것이다.

조광 국사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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