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청년들, 次善의 길에도 성공 있어… 자신감 갖고 자기만의 스토리 만들어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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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상의 회장 취임 8개월…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59)은 ‘한국 최고(最古) 기업의 경영자이자 가장 오래된 경제단체의 수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두산그룹 오너가(家)의 일원인 그는 1990년대 후반 그룹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한 주역이다. 그 덕분에 그룹은 내수, 소비재 중심에서 수출, 산업재 중심으로 단시간에 환골탈태(換骨奪胎)했다. 그가 대한상의 회장에 취임한 것은 지난해 8월. 박두병 박용성 전 회장에 이어 두산가(家)의 세 번째 회장이다. 16만7000명의 팔로어를 가진 ‘파워 트위터리안’으로도 유명한 그를 동아일보가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상의회관 20층 집무실에서 만났다. 그가 대한상의 회장 취임 후 특정 매체와 단독 인터뷰를 한 것은 처음이다. 》      
        

지난달 31일 대한상의 집무실에서 만난 박용만 회장.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지난달 31일 대한상의 집무실에서 만난 박용만 회장.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지난달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주재한 규제개혁 끝장토론에 참석해서 직접 발표까지 했는데, 끝장토론의 효과를 어떻게 보나.

“박 대통령이 7시간 동안 꼼짝 않고 앉아서 메모를 하고 질의를 했다. 규제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참석자 전원이 공감했다. 한국 사회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발표한 곱셈의 비유가 화제가 됐다.

“정부에서는 어떤 사업에 필요한 규제 6개 중 4개가 해결되면 상당한 성과가 났다고 한다. 그런데 나머지 두 개가 핵심적인 것이면 꽝이다. 숫자를 아무리 많이 곱해도 그중 하나가 0이면 결과가 0인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통계상으로 규제를 개선했는데 체감이 안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규제를 다 풀면 무법천지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공정거래를 저해하거나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에 제약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기업이 성숙할수록 제약을 줄여나가야 한다. 어느 나라든 기업이 미숙할 때는 정부의 계도 기능이 필요하다. 하지만 계속 규제하면 기업은 미숙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국제경쟁력도 떨어지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예를 들면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고칠 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을 때 4, 5년 기다려줄 수 있는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그래도 안 고쳐지면 규제를 도입하면 된다. 그런 과정 없이 바로 규제를 만들면 기업들은 야단맞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어린아이가 될 수밖에 없다. 기업들을 어른으로 대접해야 하고, 기업들도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대한상의 차원에서 규제개혁을 위해 하는 게 있나.

“풀뿌리 규제라고 하는데, 여러 중앙부처를 거친 뒤 지방자치단체에서 막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규정을 다 맞춰 갔는데 뚜렷한 이유나 법적 근거 없이 ‘민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어 곤란하다’고 하면 황당하지 않겠나. 그래서 지역별로 규제환경이 어떤지 조사해 발표하려 한다. 작년에 시작했는데 올해는 범위도 넓히고 조사 항목도 개선하겠다.”

박 회장이 주도했던 두산그룹의 구조조정에 대해서도 물었다.

―두산그룹 체질을 완전히 바꾼 주역이다.

“당시 구조조정으로 당면한 위기를 탈출한 뒤 몇 가지 결론을 내렸다. 첫째는 작은 기업 여러 개보다 큰 기업 하나가 낫다는 것이다. 둘째는 내수시장을 벗어나 글로벌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셋째는 100년 넘은 기업인 만큼 제품과 기술의 수명이 길고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한 사업을 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때마침 한국중공업이 매물로 나왔다. 인수하려 했더니 컨설팅 회사를 포함해 모두들 반대했다. 하지만 구조조정을 했던 눈으로 보니 확신이 생겨 인수를 강행했다. 이후 대우종합기계를 인수했고 기술 확보를 위해 해외 원천기술 보유 기업들을 샀다. 2007년 밥캣을 산 직후 글로벌 금융위기가 와서 고생했지만 지금은 효자가 됐다.”

―인수합병(M&A)을 많이 했는데….

“경영자에게 M&A는 마약과 같은 것이다. 기업의 외형을 단번에 키울 수 있기 때문에 한번 성공하고 나면 계속하고 싶은 유혹이 따른다. 하지만 무작정 M&A를 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인수할 때 인수한 기업의 가치를 얼마나 높일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인수 과정에서 가격을 깎는 것도 투자한 돈이 적어야 상대적으로 가치 증대가 많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물건 값을 깎는 것과 다르다. 그리고 인수를 잘하는 것보다 인수 후 어떻게 하는지가 사실 더 중요하다.”

―청년 취업난이 사회적 문제인데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 청년들은 자기표현도 잘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도 많다. 학창 시절 공부도 많이 했고 규칙도 지킬 줄 안다. 광고에서 ‘지금까지 충분히 최선을 다했고 지금 그대로도 멋있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감을 갖고 어디든 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현실에서는 대기업 취업에 매달리는 청년들이 더 많다.

“몇 개의 정해진 출발점에 서야만 미래가 보장된다고 보는 것 같다. 그 현상을 뭐라 할 수는 없다. 대기업의 월급이 높고 복리후생도 좋은 게 사실이니까. 다만 하나만 바라보기보다는 현명하게 차선의 길을 택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가 있고, 이를 통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 기성세대가 여건을 개선해 청년들이 중소기업에 갈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줘야 한다. 도전하다 안 된 이들을 위해 사회보장 제도도 개선하고 실업 지원도 강화해야 한다.”

―기성세대에서는 요즘 청년들이 참을성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렇게 우리가 키웠지 않느냐. 자식들은 춥게 키우지 않겠다고 노력해서 아파트에 뜨거운 물 나오게 하지 않았나. 내가 항상 하는 말이 ‘풍요 속의 아이들 보고 뭐라 하지 말자. 그 아이들의 풍요가 우리 삶의 목적이었지 않느냐’는 것이다.”

박 회장은 청년들이 중소기업을 기피하는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고 덧붙였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비해 식구처럼 가깝게 지내며 함께 커가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가업 상속이 어렵다 보니 아저씨 조카 사이처럼 지내던 사장이 어느 날 갑자기 ‘누가 기업을 인수할지 모르지만 잘 부탁하고 갈게’ 하는 일이 생긴다. 젊은 사원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처럼 단편적인 현상만 보고 비난하기에는 요즘 청년들이 너무 안됐다. 비난받아야 하는 건 사실 우리 어른들이다.”

박 회장은 직접 청년들의 멘토로도 나서지만 동시에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의 멘토를 찾아 세계를 돌아다닌다.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등 노벨상 수상자도 여럿 만났다고 했다.

“라구람 라잔이라는 경제학자를 1시간 만나기 위해 미국 시카고까지 갔다. 무척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바로 인도 재무부 수석경제자문으로 가더니 지금 인도 중앙은행 총재가 됐다. 애플 제품을 디자인한 프로그라는 회사의 사장으로부터는 ‘아이디어는 누구나 갖고 있다. 그런데 실패에 대한 합리적 공포가 있기 때문에 혁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회사에 돌아온 다음 ‘창의적으로 하라’는 말 대신에 ‘실패의 공포를 없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사업에서든 인생에서든 많은 멘토를 만들고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대한상의 회장으로 취임한 뒤 진보와 보수 인사들을 모아 자문단을 꾸리고 여야 정치인을 만나는 등 활발한 소통 행보를 하고 있다.

―취임 후 다양한 이들을 만나는 것 같다.

“한국만큼 심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갈등하고 대립하는 나라가 없다. 다들 국가를 위해 얘기하는데 생각이 다르고 방향이 다른 것뿐이다. 모든 걸 편 가르기로 바라보면 해결책이 나오겠나. 반대 의견을 가진 분도 왜 그런지 들어보고 대화와 소통으로 서로 간에 합치점을 찾는 게 좋다.”

―대기업 총수로서의 일상생활은 어떤가.

“트위터에 점심으로 짬뽕을 먹었다고 올리면 ‘회장님도 그런 걸 드세요?’ 이런 반응이 나온다. 드라마 속 회장들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방송작가협회에서 요청이 와 두 시간 동안 강연한 적이 있다. 드라마 속 회장과 내 생활의 차이를 자세히 얘기해줬다. 그런데 별로 변하는 건 없더라.”(웃음)

―두 회장 직을 수행하려면 바쁠 텐데 앞으로도 같이 할 생각인가.

“기업은 사익을 추구하고 대한상의는 공익을 추구한다. 기업의 일이 상의 업무에 지장을 준다고 판단했으면 처음부터 상의 회장 직을 맡지 않았을 것이다. 일정이 겹치면 무조건 상의 일을 택한다. 두산 일은 주로 밤에 한다. 문자메시지로 보고를 받고, 재가를 할 때는 ‘ㅇㅋ’(오케이라는 뜻)이라고 답 메시지를 보낸다.”

그는 잠시 쉬었다가 자신이 18세였을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고 박두병 회장)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는 회원들의 요청에 따라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상의 회장 직을 수행했다. 폐암 말기라 못 걷게 됐는데도 회의에 가겠다고 해서 두 사람이 양쪽에서 잡고 나간 적도 있다. 그날 회의를 마치고 집에 오셨는데 힘들어서 차에서 내리지 못할 정도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업어 드렸다. 평소 무서워서 말도 못 걸고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던 분이셨는데 업고 보니 어찌나 가볍던지, 그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버지는 결국 대한상의 현직 회장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내게 이 자리는 그런 자리다.”

대담=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정리=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박용만#두산그룹#대한상공회의소#경제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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