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하태원]‘핫바지’를 입은 통일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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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논설위원
하태원 논설위원
통일부는 2008년 초 전 직원이 참여했던 통일교육원 특강에 대한 우울한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이 있다. 말이 특강이지 ‘정신교육’이었다. 이명박(MB) 정부의 새로운 국정철학과 대북(對北)정책 기조를 설명하는 자리였지만 솔직히 ‘남북관계와 관련한 과거의 기억은 전부 지우라’는 요구처럼 들렸다고 한다. 한 당국자는 “‘6개월이면 북한을 무릎 꿇릴 수 있다’는 엄청난 자신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MB 정부가 어떤 식으로 북한을 다루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다. 연사는 김태효 대통령대외전략비서관이었다.

김 전 비서관이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통일부 직원들 눈에는 소년책사(策士)로 불렸던 그가 혈기왕성한 점령군 장수쯤으로 보였던 것 같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퍼주기’를 실행한 대북(對北) 포용정책의 전초기지라는 원죄(原罪)를 뒤집어쓰고 조직이 공중분해 될 뻔했던 통일부였다. 과거 10년의 존재가치를 송두리째 부정당한 것도 모자라 앞으로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뒷짐만 지고 있으라는 것처럼 들려 대단히 굴욕적인 분위기였다고 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그렇게 5년의 세월이 지나고 박근혜정부 출범과 동시에 모처럼 찾아온 남북대화의 기회가 무산되는 과정을 보면서 통일부 사람들은 묘한 ‘데자뷔’를 느낄 것 같다.

수석대표의 격(格)을 맞추는 과정에서 남북 간에 17시간의 격론이 벌어졌다. 그리고 청와대에서 ‘가이드라인’이 내려왔다. “격을 무시하거나 깨고 진행되는 것은 신뢰가 아니다.” 박 대통령의 대북정책 원칙 1호인 ‘신뢰’를 손상시킬 수 없다는 지적 앞에 과거의 관행은 설자리가 없었다. 30년 가까이 북한 문제를 연구해 온 류길재 장관이나 통일부 당국자들이 ‘신뢰’를 앞세우면 회담이 결렬될 가능성을 걱정하지 않았을 리 없다. 하지만 “남북관계의 새 틀을 짜야 한다”는 정권 초기 청와대의 자신감 앞에 이견(異見)을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5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통일을 위해 민족 내부관계로 남북관계를 보려는 목소리에 대한 냉소 역시 MB 정부 시절과 판박이다. 남북 문제를 국제관계의 시각에서 전략적으로 봐야 한다는 주문 뒤에는 국제정치적 감각 없이 북한을 특수하다고 옹호했던 과거 통일부적 시각에 대한 힐난이 자리하고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조하는 박근혜정부의 철학으로는 끈적거리다 못해 때론 더럽기까지 한 남북관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의 세계일 것이다. 실패와 결렬이 쌓이고 쌓여 신뢰의 씨앗을 뿌릴 손바닥만 한 땅마저 잃어버리느니 명분을 좀 희생하더라도 관계회복의 실리를 취하는 것이 옳았다는 일부 ‘회담론자’들의 목소리는 이제 모기소리처럼 들릴까 말까다.

장기 표류(漂流)의 가능성도 적지 않은 남북관계 속에서 “통일부는 핫바지”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류 장관이 대화에 성의를 보이지 않는 북한에 대한 경고 겸 답답함의 뜻으로 말한 ‘핫바지론’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북한이 제목소리를 못 내고 있는 통일부를 ‘핫바지’로 비아냥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6자회담에 비유하자면 청와대 안보실과 외교안보수석실, 국가정보원, 국방부, 외교부가 하나로 뭉쳐 통일부를 압박하는 형국”이라는 하소연도 들린다. 통일부가 국내에선 북한 처지인 셈이다.

김하중 전 통일부 장관은 당시 교착된 남북관계의 해법에 대해 “다 복안(腹案)이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MB 정부 내내 복안이 배(腹)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

남북관계와 관련한 최종 결정은 대통령이 내리겠지만 통일부와 그 조직의 수장인 류 장관은 대통령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보좌할 책임이 있다. 따라서 류길재 장관도, 통일부도 핫바지가 돼서는 안 된다. 스스로 입은 핫바지는 벗어버리고, 남이 입혀 주려는 핫바지는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그게 통일부의 존재 이유다.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
#통일부#북한#대북#남북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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