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정부에서 고위공직을 맡았던 한 인사는 공무원 골프 금지에 얽힌 비화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2009년 청와대행정관 향응수수 의혹이 터지고, 그해 3월 말 청와대가 100일 특별감찰에 들어가면서 공직사회에 골프 금지령이 떨어졌다. 당시만 해도 ‘얼마나 가겠느냐’는 것이 많은 이들의 생각이었다.
100일이 끝나갈 무렵 공직사회는 머지않아 해금령이 내릴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해 8월 초로 예정된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제주도 방문을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이 함께 라운딩을 하는 방안도 실무 차원에서 추진됐다.
헛물을 켰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그해 7월 초. 제3차 민관합동회의에서 한 민간 참석자가 MB에게 “경기 활성화를 위해 공무원 골프를 풀어달라”고 건의했다. MB가 웃음 띤 표정을 보이자 참석자들은 ‘드디어 공무원 골프 해금령이 내리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반대로 MB는 회의 직후 골프 금지령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주변에 밝혔다. MB와 부시 전 대통령과의 골프도 없는 일이 됐고, 전국 골프장에는 공무원들의 예약취소 전화가 줄을 이었다.
요즘 공직사회의 상황과 분위기가 이 무렵과 비슷하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100일이 넘었고, 현충일도 지났기 때문에 이제는 공무원 골프 해금령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희망 섞인 관측이 무성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박근혜 대통령이 공무원 골퍼들에게 또 한번 ‘좌절’을 겪지 않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4년 전 MB가 공무원 골프 금지령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은 글로벌 경제위기가 한창 진행되는 와중이었기 때문이다. 위기가 어디로 튈지, 얼마나 오래갈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에서 공직기강의 고삐를 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경제 상황이 그때와는 크게 다르다. 위기의 만성화로 국제교역이 위축되면서 내수 소비를 진작시키지 않고는 경기를 살리기 힘든 상황이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중앙은행이 돈을 마구 풀어 경기를 부양할 수 없는 처지면, 구매력 있는 계층이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게라도 해줘야 한다.
혹자는 공무원이 박봉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지금과 같은 경제 상황에서는 잘릴 걱정하지 않고 매달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보다 ‘두툼한 지갑’은 없다. 금리가 뚝 떨어지면서 정액지급방식인 공무원연금의 실질가치도 배 이상 높아졌기 때문에 은퇴 이후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공무원 말고는 구매력 있는 계층이 잘 안 보인다. 은퇴한 금리생활자들은 정기예금 금리가 곤두박질치면서 원금을 뭉텅뭉텅 축내지 않고는 생활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자영업자들 중에는 전 직장에서 받은 퇴직금을 다 까먹으면 문을 닫아야 하는 시한부가 상당수다. 평균적인 회사원들은 언제 잘릴지 몰라서 안심하고 지갑을 열 수 없는 처지다.
혹시 ‘업자’들의 로비를 막기 위해 공무원 골프 금지가 필요하다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유치하도록 순진한 발상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정말 구린 만남이라면 구석진 주차장이나 은밀한 술집 같은 데를 놔주고 사방이 탁 트인 골프장을 선택하겠는가. 물론 부작용도 있겠지만 박 대통령이 강조하는 소통과 창조경제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비용은 치를 수밖에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8년 대법관 전원에게 골프채를 선물하면서 골프를 권했다고 한다. “골프를 하면서 시야를 넓히라”는 것이 이유였다. 공정성과 형평성을 위해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존재인 대법관이 시야를 넓혀야 하는 이유, 골프를 하면 시야가 넓어지는 이치는 무엇일까.
박 전 대통령의 ‘깊은 뜻’을 많은 사람이 모른다고 해도, 최소한 박근혜 대통령은 잘 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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