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천광암]환공의 비극, 박근혜의 참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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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경제부장
천광암 경제부장
한비자에는 대형 인사 참사를 소개하는 유명한 글이 하나 실려 있다. 제나라 환공을 춘추시대 군주 중 최강자로 키운 명재상 관중과 관련된 이야기다.

관중이 늙고 병들어서 조정에 나올 수 없게 되자 환공은 그의 집으로 찾아가 인사 문제를 상의한다. “후임자로 누가 좋겠는가”라는 환공의 물음에 관중은 “부모보다 자식을 잘 아는 사람은 없고, 군주보다 신하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지신막약군·知臣莫若君)”며 대답을 피한다.

관중은 자신이 생각하는 적임자를 추천하는 대신 환공이 염두에 두고 있는 인물의 이름을 말하면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겠다고 한다. 환공은 포숙아, 수조, 개방, 역아, 습붕 순으로 후보자를 이야기한다. 관중은 앞의 네 명에 대해서는 각각의 이유를 들어 “불가하다”고 대답한다. 관중이 천거한 인물은 욕심이 적고 신의가 두터운 습붕이었다.

군신 간에 이런 문답이 있은 지 얼마 뒤 관중은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환공은 관중이 추천한 습붕 대신 수조에게 정사를 맡겼다. 그로부터 다시 2년이 지난 뒤 환공은 남쪽 국경지방으로 유람을 간다. 이 틈을 타 수조는 역아, 개방 등과 짜고 반란을 일으킨다. 환공은 작은 방에 감금돼 물도 한 모금 못 마시고 굶어 죽는다. 환공의 시신은 그가 죽은 뒤 3개월이 지나도록 방치돼, 구더기가 방 밖으로 기어 나왔다고 전해진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문 의혹 사건으로 마음이 가장 참담한 이는 아마 박근혜 대통령일 것이다. 한미동맹 60주년이라는 뜻깊은 시점에 일궈낸 다양한 방미 성과는 조금도 주목을 받지 못했고, 상승세를 타던 지지율 곡선도 급속히 곤두박질치고 있다. 독신 여성인 박 대통령으로서는 이런 종류의 추문이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소름끼치게 싫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윤창중 사태의 원인에 대해, 그를 조금이라도 겪어본 사람들은 부적절한 인물을 부적절한 자리에 앉힌 것이 발단이라고 입을 모은다. 요컨대 충분한 검증과 평판조회를 생략한 ‘나 홀로 인사’가 빚어낸 인사 참사라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비슷한 실수를 한 환공이 당한 수모와 비교해 보면 방미 성과에 먹칠을 당하고 국제적으로 망신살이 뻗친 정도는 오히려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 일인지 모른다.

박 대통령이 지금까지 ‘나 홀로 인사’를 고집해온 것은 ‘군주보다 신하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는 종류의 생각이 의식이나 잠재의식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관중 같은 현인이 환공의 물음에 이렇게 답변을 한 것은, 우선 군주의 체면을 세워준 뒤 자신의 할 말을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과거 정권에서 모든 대통령이 친인척 비리와 측근 비리를 뿌리 뽑겠다고 수도 없이 맹세했지만 매번 반복되는 이유가 뭐겠는가. 내 주변 인물은 내가 가장 잘 안다는 잘못된 믿음이 대통령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생 아들을 키우는 필자는 불과 1, 2년 전까지만 해도 ‘부모보다 자식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믿어 왔다. 그런데 최근 몇 가지 일을 겪고 나서 생각을 바꿨다. 몇 달 전 아들의 반 친구 A 군에 대해 일부 학부모들 사이에 사소하지만 안 좋은 소문이 퍼진 적이 있다. 우리 부부는 평소 안면이 있는 A 군 부모에게 알려줄지 말지 고민하다가 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결국 이 소문은 A 군 부모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그때는 동네의 모든 학부모가 다 알고 난 다음이었다.

몇 달 뒤에는 우리 부부가 A 군 부모와 같은 일을 겪었다.

자식은 부모가 가장 모르고, 신하는 군주가 가장 모른다. 그래서 귀를 열어둬야 한다. 필자처럼 평범한 사람도 알게 된 이치를 박 대통령이 빨리 깨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천광암 경제부장 iam@donga.com
#윤창중#박근혜#성추행#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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