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44>새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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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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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규원(1941∼2007)

어제 내린 눈이 어제에 있지 않고

오늘 위에 쌓여 있습니다

눈은 그래도 여전히 희고 부드럽고

개나리 울타리 근처에서 찍히는

새의 발자국에는 깊이가 생기고 있습니다

어제의 새들은 그러나 발자국만

오늘 위에 있고 몸은

어제 위의 눈에서 거닐고 있습니다

작은 돌들은 아직도 여기에

있었다거나 있다거나 하지 않고

나무들은 모두 눈을 뚫고 서서

잎 하나 없는 가지를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 사이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비유라든가 상징이라든가 하는 시적 장치를 배제하고, 풍경을 동영상으로 찍은 듯 제시했다. 어제 내린 눈은 과연 어제에 있지 않고, 오늘 위에 쌓여 있다. 오늘, 쌓인 눈을 보고 있는 바로 지금. 개나리 울타리 근처에 새가 내려앉아 발자국을 찍는다. 그 발자국에 깊이가 생기고 있단다. 그로 미루어 또 눈이 내리고 있는 거다. 눈 위에는 어제의 새들 발자국도 남아 있다. 마당에 깔린 조약돌들은 눈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잎이 죄다 진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삐죽빼죽 허공에 뻗고 있다.

이렇게, 언뜻 눈과 새와 작은 돌들과 나무들을 그리고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허공의 윤곽이다. ‘새와 나무’는 허공에 관한 정교하게 시각적인 시다. 새의, 작은 돌들의, 나무들의 그 허공은 공간의 허공일 뿐 아니라 시간의 허공이기도 하다. 어제와 오늘, 기억과 흔적, 부재와 현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하염없이 이어지고 끊어지는 허공의, 희고 부드러운 정적(靜寂)….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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