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차지완]우리 사회의 ‘히든 크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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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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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완 사회부 기자
차지완 사회부 기자
“그게 알려지면 어디 시집이라도 갈 수 있겠나.”

옛날 어른들은 그랬다. 설령 딸이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더라도 이를 입 밖에 꺼내는 것은 금기였다. 딸의 고통보다 중요한 게 가문의 위신이고 평판이었다. 딸도 눈물을 삼키고 입을 꾹 닫았다.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평생을 주홍글씨를 단 채 살아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성범죄 피해 사실은 무덤에 갈 때까지 함구해야 할 사안이다. 성범죄 피해를 숨기려는 사회의 암묵적 분위기 탓에 성범죄는 ‘히든 크라임(Hidden Crime)’, 즉 암수(暗數) 범죄가 됐다. 실제로 발생했지만 피해자가 신고하지 않아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성범죄 피해자가 신고하는 비율은 10%에 그친다. 90%는 집안 체면 때문에, 가정 파탄을 막기 위해 신고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잇따르는 성폭력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두 아이의 엄마를 성폭행하려다 무참히 살해한 인면수심의 서진환은 암수라는 불편한 진실까지 세상에 들춰냈다. 그는 이 사건을 일으키기 13일 전에 똑같은 수법으로 다른 여성을 성폭행했다. 피해 여성은 가족에게 성폭행 사실이 알려지는 게 두려워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어쩌면 서진환은 피해 여성의 90%가 신고를 꺼린다는 점을 간파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범행 13일 만에 2차 범행의 희생양을 찾아 버젓이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전자발찌까지 차고서….

성범죄처럼 친고죄가 적용되는 범죄는 암수범죄가 많다. 친고죄란 범죄 피해자가 고소해야만 수사를 통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범죄다. 현행법에 따르면 13세 미만 여자 어린이와 장애인에 대한 성범죄는 고소 없이도 수사가 가능하지만 성인 여성은 반드시 고소가 있어야 처벌할 수 있다. 대부분의 여성이 신원 노출을 우려해 신고하지 않는 사이 우리 사회는 서진환 같은 괴물을 키우고 있었다.

이건 신고하지 않은 여성의 책임이 아니다. 피해자의 입을 닫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퇴행적 문화의 산물이다. 용기를 내 법정에 선 피해자에게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고 낙인을 찍어 버리는 야만성에도 큰 책임이 있다.

권재진 법무부 장관이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성범죄의 친고죄 조항 폐지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힌 뒤 친고죄 폐지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치안의 사각지대를 휘젓고 다니는 제2, 제3의 서진환을 막기 위해 성범죄의 친고죄 조항은 폐지돼야 한다.

일각에선 그로 인해 부작용이 커질 것이란 우려가 있다. 피해자의 신원이 노출될 우려가 크고, 피해 보상의 길이 막힐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경청해야 할 대목이지만 이런 부작용은 제도 보완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성범죄 피해 여성에 대한 사회의 따뜻한 시선이다. 지난달 집에서 괴한에게 성폭행을 당한 20대 임신부의 남편이 인터넷에 올린 글은 그래서 울림이 크다. 그는 “아내와의 불화가 생기거나 가정이 파경으로 치닫지 않을까 걱정해 주시는 분들께, 저는 제 아내를 끝까지 사랑할 것이라 맹세드린다”고 했다.

친고죄 폐지로 추가 성범죄 피해를 막는 데 따른 혜택은 사회 구성원 전체가 누린다. 따라서 성폭력 피해 여성이 당당한 ‘서바이버(Survivor)’로 설 수 있도록 주홍글씨를 거둬들이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책무다.

차지완 사회부 기자 cha@donga.com
#히든 크라임#성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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