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디 가?’ 장루이 푸르니에의 소설 제목이다. ‘아빠 어디 가’를 수시로 외쳐대는 장애아 둘을 둔 아빠의 고군 분투기다. 이 책에 “장애아의 아빠는 웃을 자격이 없다. 장애아를 둘이나 가진 아빠는 곱빼기로 슬픈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아를 둔 부모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예전에 근무하던 직장 동료의 경험이 떠오른다. 출산을 앞두고 초조하게 병원 분만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의사가 와서 한마디 던지고 갔다. “혹시 장애아일지 모르니 준비를 해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손이 여섯 개인가? 머리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아이가 이 세상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을까? 아이가 자라는 동안 받을 고통은 어떻게 감당하나? 내가 죽으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나? 짧은 순간에 온갖 상념이 떠오르면서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마이클 올리버는 영국의 저명한 장애학자다. 그는 어린 나이에 다이빙을 하다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는 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됐고 평생 장애 연구에 헌신했다. 그의 장애 연구의 핵심적 내용 중 하나는 사회구조가 장애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장애인은 집을 나서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이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움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으며 자신의 집에서 조용히 있을 때는 장애를 느끼지 않지만, 집 밖에 나서는 순간 고난은 시작된다. 계단은 왜 이리 많은지,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은 왜 이리 부족한지. 참을 수밖에 없다. 화장실을 되도록 적게 다니기 위해 먹는 물의 양을 조절하기도 한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이 의식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자신이 원해서 장애인이 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장애인으로 사는 것을 원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의 선택이 아닌 주어진 여건에 맞춰 살아간다. 부모를 선택할 수도, 고향을 선택할 수도 없다. 장애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든지, 고향이 어디든지 삶에 별 차이가 없다면 좀 더 바람직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장애인이든지 비장애인이든지 삶에 있어 차이가 별반 없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책무이기도 하다.
‘아빠 어디 가’를 외쳐대는 아이에게 대답을 해줘야만 하는 사람이 아빠만이 아니라 사회도 될 수 있다면, 장애아일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는 부모에게 떠오르는 것이 장애아동이 불편은 하겠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을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이라면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이 여전히 불편할지라도 충분히 살 만한 세상이지 않겠는가.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할 사람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우리 사회일 것이다. ‘아빠 어디 가’라고 묻는 아이에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아빠는 네가 원하는 곳을 사회와 함께, 그리고 너와 함께 가고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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