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주성하]동료애 없는 ‘남쪽 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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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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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국제부 기자
주성하 국제부 기자
대한민국 주민등록번호를 받은 지 올해로 딱 10년이다. 열 살짜리 눈으로 본 한국의 정치판은 파란색 유니폼 팀과 노란색 유니폼 팀의 두 라이벌이 양분한 축구 리그를 닮았다.

룰도 단순하다. 말로는 상생 민주 비전 등 온갖 화려한 단어를 나열하지만 실전에선 상대방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골을 많이 넣는 팀이 이긴다.

팀 내 주전 경쟁도 치열하다. 주전 선수는 유소년→유망주→2군→벤치→선발이라는 코스를 거쳐야 한다.

선발로 출전해 경기를 뛰다 보면 태클로 치명상을 입는 경우가 흔하다. 일부는 재활을 거쳐 돌아오지만 선수생명이 끝나는 경우도 많다. 결정적 자살골로 경력에 마침표를 찍기도 한다.

4년마다 이적시장이 열리면 생존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아무리 과거에 날아다녔다 해도 체력이나 기량이 저하됐거나, 부상 후유증이 길거나, 몸값에 비해 활약이 별로라는 등의 이유로 경쟁자에게 자리를 내줘야 하는 것이 이 세계다.

선수는 벤치 후보만 돼도 팬들이 생긴다. 벤치에 앉기까지도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능력을 입증하는 것은 당연. 언행에 신중해야 하고 구단에서 죽으라면 죽는 흉내도 내야 한다. 라이벌 팀에 도움이 되는 말을 했다간 팬들에게 찍힌다. 모처럼 기회가 오면 미친 존재감을 보여줘야 한다. 외부에서 온 사람도 몇 년이면 아는 이치를 여기서 평생 산 사람들이 모를 리 없다.

요즘 노란 팀이 탈출 선수라는 골치 아픈 문제에 맞닥뜨렸다. 북쪽 지역이 연고지인 빨간 팀에서 선수 학대가 지나쳐 일부 선수가 도망치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빨간 팀은 탈출 선수들을 붙잡아 끌고 간 뒤 고문을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한단다.

누구나 분노할 일이지만 노란 팀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원래 노란 팀은 빨간 팀과 교류가 적지 않았다. 노란 팀은 자금 지원을 좀 해주면 선수 학대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주장하며 실제로 오랜 기간 적잖은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탈출 선수는 오히려 더 늘고 있다.

노란 팀 선수들에겐 난감한 일이다. 눈과 귀가 있는 이상 빨간 팀 탈출 선수들의 비참한 인권유린 상황을 모를 리 없지만 눈치 없이 구단의 결정과 달리 개인적 소신을 피력했다간 찍히기 십상이다. 극성팬들의 야유도 무섭다. 이 바닥에선 내 편 네 편 가리지 않고 바른말하는 선수는 어느 구단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노란 팀 선수들에겐 요즘 구단의 관심사인 제주도의 ‘구럼비 컵’이 훨씬 더 중요하다. 여기서 펄펄 뛰는 선수는 구단과 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전 자리를 굳힐 수 있다. 룰을 무시하는 거친 파울에 파란 팀이 항의해도 개의치 않는다. 여기서 기선을 잡아야 4년에 한 번 열리는 다음 달 내셔널 리그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파란 팀도 한심한 건 마찬가지이다. 평소 빨간 팀의 인권 상황에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이는 척 해왔던 것과는 달리 요즘엔 노란 팀의 공세에 밀려 빨간 팀까지 제대로 신경 쓸 여력이 없는 듯하다. ‘내 코가 석자인데…’라는 식이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목숨을 위협받는 빨간 팀 탈출 선수들은 끊임없이 남쪽 동료들의 도움을 호소한다. 인권과 정의, 양심을 기회마다 내세우는 이곳 선수들이 실은 구단과 팬들에게 매여 양심을 저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주성하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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