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미석]독 묻은 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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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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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 전문기자
고미석 전문기자
독설의 대가는 끝내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해온 어느 토크쇼 진행자의 설화(舌禍)다. 방송에서 여성비하 발언을 했다가 많은 여성의 격분을 샀고, 자기편이란 사람들조차 도가 지나쳤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웃자고 한 표현이 좀 부적절했다고 얼버무리려 했으나 형식적 사과에 여론은 분개했고 마침내 광고주가 떨어져 나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장과 비방의 막말로 흥행에 재미를 본 그는 결국 그로 인해 막장에 이른 것일까.

비방-막말, SNS 타고 무한증식

한국 얘기가 아니다. 미국에서 보수 우파의 가장 영향력 있는 논객으로 꼽히는 러시 림보에게 생긴 일이다. 그는 1500만 명의 라디오 청취자를 갖고 있다. 민주당과 진보성향 인사를 조롱하는 게 주특기고, 그의 생업이다. 자극적인 여성비하와 인종차별 발언을 곁들여 종종 논란을 빚고 그럴수록 청취율은 올라갔다. 이번엔 학교 의료보험의 문제점을 청문회에서 증언한 법학대학원생을 ‘창녀’라고 비아냥댔고 사태 수습에 또 한번 특기를 발휘한다. 실수를 이슈화하는 것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보는 정적들의 음모라고 맞받아친 것이다. 어지간한 도덕적 결함도 정치적 공세라고 우기면 피해갈 구멍이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 망신을 덮어줄 이념의 우군은 언제나 있다는 것도.

세 치 혀로 생을 영위한 군상은 동서고금에 널려 있다. 천하를 제 것으로 만들고자 꿈꾸던 궤변의 달인들이 만약 자신이 뱉은 말을 빛의 속도로 퍼뜨리는 오늘의 테크놀로지를 만났다면 그 꿈을 한층 쉽게 이뤘을 것이다.

한국도 예외일 리 없다. 되레 한술 더 뜬다. 갈등을 조장하는 독한 말로 인기를 얻고, ‘임신부 폭행 사건’ 같은 연속 시리즈를 만들어내며 그릇된 정보 확산에 매달린다. 의도가 화풀이든 전략이든 사회는 그때마다 한바탕 휘둘렸다. 인간의 소프트웨어는 나아진 게 없지만 말 옮기는 기술은 급하게 발전하면서 말이 요술을 부리고, 크고 작은 모니터에서 눈 떼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기술과 말장난의 포로가 되어간다. 사사로운 일과 감정이 느닷없이 액정화면에서 튀어나와 사회적 발언이 되고, 공적 이슈가 된다. 그 사이에 말은 타락한다. 야비한 마음에 품은 독이 무책임하게 쏘아 올린 독화살로 변하고 암세포처럼 무한 증식해 세상을 뒤덮어간다.

‘세상은 조용한데 누가 쏘았는지 모를 화살 하나가 책상 위에 떨어져 있다./누가 나에게 화살을 쏜 것일까.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나는 화살을 들고 서서 어떤 알지 못할 슬픔에 잠긴다./심장에 박히는 닭똥만한 촉이 무서워진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아파왔다./-혹 이것은 사람들이 대개, 장난삼아 하늘로 쏘는 화살이, 내 책상에 잘못 떨어진 것인지도 몰라!’ (고형렬의 ‘화살’)

거짓말, 헐뜯고 이간질하는 말, 현란하게 꾸며대는 말, 거친 말. 부처가 중생을 위해 알기 쉽게 정리해준 10가지 악업 중 말에 관한 것이 4개다. 모두 무간지옥에 갈 악으로 꼽힌다. 말의 칼날에 베이는 것이 몸에 가한 폭력만큼이나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가르침이다. SNS 시대엔 ‘치명적 말을 퍼 나르는 일’도 추가될 듯하다. 무심코 저지른 죄라고 용서받는 것은 아니다.

몸의 폭력만큼 치명적 상처 남겨

어느 늙은 마사이족 전사가 손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인생이란, 서로 끊임없이 싸우는 두 마리의 사자를 가슴속에 품고 사는 것과 같은 것이란다. 한 놈은 복수심에 가득 차 있고, 공격적이고 난폭하지. 다른 한 놈은 정이 많고, 부드럽고, 사랑이 가득하단다.” 둘 중 누가 이길까 묻는 손자에게 그는 답했다. “네가 먹이를 주고 키우는 놈이 이기게 된단다.”

선택은 내 몫이다. 독 묻은 화살을 만지면 내 손에도 독이 묻는다. ‘거친 말을 쓰지 말라, 그것은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악을 보내면 화가 돌아오나니. 보복의 채찍이 너의 몸에 이를 것이다.’(법구경)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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