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이것만은…/한젬마]나만의 작품세계 보여줄 비석 한 개 남겼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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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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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자신만의 화풍 담은 그림같은 묘화비 눈에 어른
후대에 길이 남을 작품 위해 마지막 날처럼 최선 다할 것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100년 인생 설계를 운운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인생을 사람이 설계할 수 없는지라 나는 늘 내 수첩에 새겨둔 한 구절을 되뇐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어느 시점에 내게 주어진 생을 마무리하게 될지 모를 인생길에 이 한마디는 주어진 순간을 소중하게, 최선을 다하게, 그리고 욕심을 걸러내게 해준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마무리 지어진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빚어질 나의 결정체는 어떨까. 늘 상상해 본다.

39세에 요절한 반 고흐는 젊은 나이에도 개성 넘치는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남겼고,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드러낸 피카소는 90년 이상 살면서 자신만의 남다른 세계를 광활하게 남겼다. 내 나이 이미 고흐의 생의 길이를 넘어섰고, 피카소 같은 장수를 희망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의 마지막 바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근대 화가들의 묘를 답사하면서 갖게 됐다.

박수근 화백의 묘 비석은 미술관의 어떤 작품보다 나를 감동시켰다. 처음 그 비석을 보았던 건 박 화백의 묘가 경기 포천시 동신교회 제2묘역에 모셔졌을 때다(지금은 고향 강원 양구군으로 이전됐다). 셀 수 없이 많은 무덤 사이에서 박 화백의 묘를 찾기란. 크기도 생김도 어찌나 비슷비슷하던지. 게다가 비석에 남겨진 고인들의 한자 성함을 일일이 식별해야 했으니.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의 묘지 표지 하나 없단 말인가.’ 불평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쳐가던 중 내 눈에 들어왔다. 한 폭의 그림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 석자를 남긴다고 했던가. 박 화백은 죽어서 그림 같은 비석을 남겼다. 이름 석자를 넘어선 박수근 묘화비. 박 화백이 평생을 거쳐 빚어낸 자신만의 화풍이 담겨 있었다. 지친 발걸음 끝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나타난 박 화백의 비석은 아름다웠다. 비석 앞에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그 묘화비 앞에서 내 마음 속에 꿈을 심었다. ‘나도 나만의 작품 세계를 비석에 새겨 내 생을 한눈에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평생 산을 그린 ‘산의 화가’ 유영국 화백의 묘지 입구엔 커다란 바위 하나가 그의 작품 세계를 상징한다. 그의 작품 세계를 닮은 산 모양의 바위. 그 바위엔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나는 그 커다란 바위 앞에서 산을 품고 왔다.

이중섭 화백의 묘 앞에서는 검은 자연석 한 귀퉁이의 작은 그림을 보며 한국이 자랑하는 이 화백의 위력을 실감했다. ‘빛의 화가’ 하인두 화백의 기념 묘화비 또한 장관이었고, 대구 천재화가 이인성의 묘 앞 팔레트 모양의 제석 또한 영감을 주었다. 장욱진 화백의 유골함이 모셔진 묘탑비에서는 아름답게 한 점의 조각상처럼 남게 된 화가의 일생을 만났다. 화가는 죽어서 예술을 남긴다. 이처럼 아름답고 숭고하게.

1995년부터 ‘관계’라는 주제를 가슴에 품고 연결 속성이 있는 오브제인 지퍼, 못, 똑딱단추, 경첩, 플러그 등으로 작품을 만들어 온 나는 최근에 주로 못으로 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관계의 이치를 깨달으며 매순간 죽으며 거듭 태어나겠다는, 그리고 희생하겠다는 주제를 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이 여생 동안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할지 모르겠지만 나의 비석은, 비록 나는 세상을 떠났어도 남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거듭 태어나고 소통하는 매개였으면 한다.

나의 분신이 되어 줄 그림 같은 나무 밑동 하나, 망치, 못 박스를 세트로 준비해 내 무덤 앞에 설치를 부탁하리라. 커다랗고 멋진 나무 조각하나 박아놓고. 나를 찾는 이들이 나의 나무 비석에 못을 하나씩 박으면 어떨까. 나에게 못을 박고 그렇게 거듭 나를 깨워 함께 만나며 내 일생을 통해 함께 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가 가려질 만큼 빼곡하게 못이 박혔으면 좋겠다. 나를 찾아 함께한 수많은 사람들의 못이 작은 무덤을 만들리라.

이렇게 소망해 본다. 죽기 전 미술가로서 후대에 영감을 줄 수 있는 작품세계가 구축되도록 내게 주어진 오늘도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하려 한다.

한젬마 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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