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이다. 일이 늦어져 오후 11시쯤 귀가했는데 아파트 정문에서 중학생 또래 학생들이 학원 수업을 마쳤는지 승합차에서 우르르 내리더니 다른 학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오후 11시는 13세 안팎 아이들이 귀가하기에도 늦은 시간인데 또다시 학원을 가다니, 이런 학생들은 도대체 언제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는 걸까. 의아한 한편 측은한 생각이 들어 잠시 나의 유년 시절을 돌이켜 보았다. 부모님이 이민을 가 필자는 독일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학업을 마쳐 한국 청소년의 고단한 현실을 말로만 들었는데 이날 처음으로 피부에 와 닿았다.
이 같은 현실을 대변하듯 한국 청소년들의 평균 수면시간은 6시간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반면 유럽지역 청소년들은 평균 8시간 이상 수면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학창 시절에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는 친구를 본 적이 거의 없다. 성장기 청소년에게 충분한 수면은 성장과 건강한 생활 유지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 청소년들은 정신과 육체적 건강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충분한 수면조차 허락되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잠을 줄여야 할 정도로 청소년 대부분이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 정신건강 수준은 위태로운 지경이다. 실제 한국 청소년의 행복지수가 3년 연속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고,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결과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학업 스트레스, 불면, 과도한 경쟁 등으로 고통과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청소년들을 제대로 관리하고 상담해 줄 울타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청소년 정신건강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는 지금, 정부의 제도적 지원뿐만 아니라 학계, 기업, 시민을 아우르는 사회적 관심과 민관 차원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필자가 근무하는 한국아스트라제네카는 ‘더 건강한 내일을 위한 파트너십’을 추구하는 기업 이념에 따라 올해부터 자살예방협회와 청소년 정신건강 증진 및 자살 예방을 위한 ‘영 헬스-청소년을 위한 생명사랑 캠페인’을 시작한다. 이 캠페인을 통해 청소년 정신건강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춘 인터넷 교육 콘텐츠를 개발해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 수준을 높이고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또 자살예방전문가 및 또래 게이트키퍼 양성을 통해 자살 고위험군을 선별해 예방하는 제도를 마련할 예정이다.
청소년들은 장차 건강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이끌어 나갈 우리 사회의 미래다. 우리는 이들의 성장을 위해 조화로운 교육이 바탕이 된 행복하고 건강한 인재로 키워낼 의무가 있다. 신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청소년 개인이 극복할 문제로 도외시돼 왔던 정신건강 문제를 함께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히 청소년 정신건강 문제는 그들의 문제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함께 해결책을 찾는 능동적 방식을 통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건강과 자살이라는 사안의 민감성 때문인지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선뜻 나서려는 단체나 기업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누가 내게 물었다. “이 어려운 캠페인의 성공 기준을 대체 무엇으로 정의할 건가요.” 내게는 그 질문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캠페인을 통해 우리가 단 한 명의 청소년이라도 극단적인 선택에서 맘을 돌리게 할 수 있다면, 단 한 생명이라도 살려낼 수 있다면 그것이 이 캠페인의 목적이고 성공이라고 나는 믿는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했다. 이제 자살예방협회와 시작하는 ‘영 헬스’ 캠페인을 통해 내 아이와 내 이웃의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우리 청소년의 정신건강에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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