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는 미덕’이라는 명제는 오늘날 미국의 외교정책에 들어맞지 않는 듯하다. ‘오랜 전쟁(the long war)’을 생각해보자. 테러에 맞서 계속돼온 싸움을 가리키는 이 말은,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은 게 사실이지만 그 대가로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져야 했다.
무엇보다 ‘오랜 전쟁’이라는 말은 속전속결에 익숙한 미국 국민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오랜 전쟁은 군사 문제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정부와 민간기구가 함께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정가에서는 정치적 합의를 모아 ‘오랜 전쟁’을 치러왔다. 그리고 미국은 거대한 테러까지 겪어야 했다.
최근 예산 편성이 난항을 겪으면서 정치적 합의가 흐트러지는 분위기다. ‘오랜 전쟁’을 위한 희생과 헌신이 국민적 동의를 얻었다지만 정치인들은 이 전쟁에 엄청난 비용을 들이는 것에 회의하고 있다. ‘예산 전쟁’은 미국이 국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답이 바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이 다른 국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고립주의 정책에 대한 논의가 부각되는 듯하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보수 진영으로부터 전 세계 국가들에 지나친 친절을 베푸는 것이라고,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세계 문제를 좌지우지하는 것이라고 비판을 받아왔다. 이제 양당 모두 예산 문제로 고심하면서 고립주의 정책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다.
미국의 재정위기는 심각하다. 숫자의 문제만이 아니다. 워싱턴 정가에서 세금 인상에 대한 반감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세금과 정부의 관계가 위스키와 알코올의 관계와 같다는, 펀더멘털의 관점을 대변한다.
미국 국민은 학교와 병원, 교통수단 같은 국내 문제로 눈을 돌리기를 원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콜로라도 주 엘파소의 경우 학급 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예산이 부족해 스쿨버스 대수를 줄이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인이 아프가니스탄 학교 설립 지원에 나설 겨를이 있겠는가. 미국의 자부심으로 꼽혔던 공공 기반시설은 또 어떤가. 미국 여행객들은 아시아의 신공항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낡은 공항들과 비교하게 될 것이다.
최근의 예산 전쟁은 미국 인프라와 관련해 별다른 합의를 이루지 못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 문제가 국내 이익과는 관계가 없지 않느냐는 의견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왜 아프가니스탄의 학교와 도로가 콜로라도나 캘리포니아의 공공시설보다 더 중요하냐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미국의 외교 문제와 깊은 연관을 갖게 된다.
사람들은 많은 이유로 조언을 받아들인다. 조언자의 통찰을 존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언을 안 받아들였을 때의 결과를 두려워해서이기도 하다. 지금껏 미국 외교에 통용돼온 조언은 다른 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는 동시에 부가적 원조를 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외교정책 역시 경제적 지원을 수반해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자국 문제에 대한 예산 투입을 주저하는 정가에 지친 국민들이 ‘오랜 전쟁’에 대한 지원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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