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22일 베이징 올림픽 한국과 일본의 야구 준결승. 2-2로 맞선 8회 1사 1루에서 이승엽이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앞선 세 타석에서 삼진 2개와 병살타로 물러나는 등 타율 1할대의 부진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대표팀 김경문 감독(두산)은 이승엽을 4번 타자로 계속 기용했다. 그리고 이승엽은 일본의 마무리 이와세를 상대로 역전 2점 아치를 쏘아 올렸다. 한국은 김 감독의 ‘믿음의 야구’로 퍼펙트 금메달(9전 전승)을 목에 걸었다.
김 감독은 2004년 두산 사령탑이 된 뒤 2군의 가능성 있는 신인에 주목했다. 김현수 이종욱 등을 1군에 올렸다. 삼진을 당해도, 실책을 해도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며 원석을 다듬었다. 그들은 무명에서 스타가 됐다. 두산이 지난해까지 6번이나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원동력이었다.
그런 김 감독이 13일 전격 사퇴했다. 지난주 팀이 1145일 만에 7위로 떨어진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그는 사퇴 의사를 밝힌 뒤 주위와 연락을 끊었다. 두산 관계자는 “이달 말 자녀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떠난다”고 전했다. 그가 언제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당분간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미래를 구상할거다.
프로야구계는 김 감독의 갑작스러운 퇴장에 충격에 빠졌다. 일선 감독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두산과 한국시리즈에서 2번 만났던 SK 김성근 감독은 “언제든 상위권으로 올라올 팀인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5월 말 잠실야구장에서 김 감독을 만났다. 두산은 연패를 거듭하던 중이었다. 그는 더그아웃에서 기자에게 “옆에 앉으라”고 했다. 그러곤 “내가 야구를 잘 못해서 재미없지? 미안해”라며 웃었다. 그때 그는 이미 자신의 거취를 결심한 상태였던 모양이다.
김 감독은 계약 마지막 해인 올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꿈꿨다. 3번 준우승에 머문 한을 풀겠다고 했다. 하지만 탄탄하던 팀워크가 흔들렸다. 손시헌 등 주전 선수의 부상이 이어졌다. 마무리 임태훈은 염문설에 휩싸였던 모 아나운서의 자살로 전력에서 제외됐다. 팀이 한없이 추락하자 김 감독은 선수단의 단합을 기원하며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김 감독은 두산 유니폼을 벗었지만 ‘명장의 귀환’은 시간문제다. 팬들은 쉼 없이 치고 달리는 김 감독의 야구를 원한다. 벌써부터 그가 내년에 제9구단 엔씨소프트 등의 사령탑 후보에 올랐다는 소문이 나온다. 김 감독은 보여준 것보다 보여줄 게 많은 리더다. 기자는 믿는다. 젊은 선수의 패기를 믿고 방망이를 쥐여주던 김 감독이 또 다른 믿음의 야구로 그라운드로 돌아올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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