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 8일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김대중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김정일을 긍정적으로 소개하면서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권했다.
비단 이때뿐 아니라 DJ는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고 온 뒤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많이 했다. 김정일을 만날 기회를 얻었던 다른 인사들도 그런 말을 많이 한다.
외부세계에서는 독재자, 테러리스트로 찍혀 있지만 직접 만나본 사람들로부터는 호평을 받는 지도자는 김정일만이 아니다. 과거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를 만난 사람들은 그의 카리스마와 민중 사랑을 칭송했다. 석학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 같은 이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오사마 빈라덴 역시 일부에선 우상처럼 칭송돼 왔다. 남미 민중 해방에 삶을 바친 체 게바라에 비유하는 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상반된 평가를 받는 지도자가 죽음이나 파멸 등 한계상황에 닥쳤을 때 본색이 드러남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례는 메인스트림의 평가가 옳았음을 증명해준다.
비디오 메시지 속에서 산악지대 동굴을 배경으로 등장했던 빈라덴은 부촌의 저택에서 여러 부인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엔 부인보다 뒤에 있었다. 설사 부인이 인간 방패를 자처한 것이라 해도, 동네 깡패조직의 보스 정도만 되어도 “나만 죽여라”라고 나서며 아내를 옆으로 밀쳐내지 않았을까.
빈라덴을 만나본 사람들은 그가 항상 부드럽게 악수했다고 전한다. 온화하고 인자한 성품이라는 평판도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의 넷째 아들의 증언이 담긴 책은 자녀들을 자주 때리고 애완동물을 사격 연습 대상으로 삼는 빈라덴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카다피는 정권이 위기에 몰리자 시민을 파리 목숨 취급하고 있다. 합리적인 성품의 서구 유학파로 묘사됐던 시리아의 알아사드 대통령은 1982년 4만 명을 죽인 아버지의 ‘학살 유전자’를 세습한 듯 시위대를 무차별 사살하고 있다.
비록 오류로 드러난 이념이었지만 진정성을 갖고 사회주의 이상을 꿈꾸며 마지막까지 신독의 삶을 산 혁명가라면 베트남의 호찌민, 남미의 체 게바라 정도가 꼽히지 않을까. 드러나는 빈라덴의 실체 앞에서 체 게베라 운운했던 지식인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마땅하다.
아무리 독재자라고 해도, 국가나 거대한 조직의 지도자가 호의를 베풀며 인간적 매력을 살짝 보여주면 사람들은 쉽게 감동한다. 미국의 지도자론 연구자들은 ‘Dictators can be charming’이란 말을 자주한다. 베일 속의 독재자는 멋있게 보이기 쉽다는 뜻이다. 1972년 평양을 방문한 일본 잡지 ‘세카이’의 야스에 료스케 편집장은 김일성이 숙소까지 찾아와 6시간 동안 대화를 나눠주자 ‘따뜻한 포용력, 인자하신 인품’이라며 김일성을 극찬했다. 반면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인은 멋있게 보이기 힘들다. 장단점이 모두 투명하게 드러나고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DJ로부터 김정일 칭찬을 들은 부시의 반응은 어땠을까. 기자는 미국의 정통한 외교관계자로부터 당시 오간 비공개 대화 내용을 전해 들었다. 부시는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귀하나 저나 정치를 하는 사람 아닙니까?” 부시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정치를 합니까. 정치라는 건 국민을 편안히 잘살게 해주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김정일이 정치지도자라 할 수 있습니까. 자기 국민을 굶어 죽게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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