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배우리]새 주소에 땅이름도 함께 썼으면

  • 동아일보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국가지명위원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국가지명위원
땅이름은 우리 조상이 준 무형의 자산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직해야 할 좋은 땅이름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사라져 갔다. 그렇게 된 데는 우리의 잘못이 컸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땅이름이 많이 훼손되고 사라졌지만 광복 후로도 제대로 살려 놓지 못했고 상처도 치유하지 못했다.

최근 새 주소를 사용하면서 많은 땅이름이 또 한 번 사라질 처지에 놓였다. 큰길 중심으로 길에 이름을 붙이면서 마을 골목마다 있던 땅이름을 거의 부를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독바위길, 진달래길, 새말길, 창고터길, 큰고개길과 같은 토박이말에 기초한 길 이름이 ‘○○로 19가길’ 식으로 바뀌면서 토박이 땅이름을 접하기 어렵게 되었다. 모든 곳에는 고유 이름이 있게 마련인데, 이름을 이처럼 숫자 일색으로 만들어야 하느냐는 불평이 나오고 있다.

기존 주소(지번) 체계가 불합리하고 도로 중심의 주소 체계가 길 찾기에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새 주소 체계는 이름의 근간이 되는 도로명의 수를 너무 줄여 놓았다. 예를 들면 세종로∼태평로∼남대문로로 이어지는 길을 ‘세종대로’로 해 서울 시민이 익히 불러 온 ‘태평로’라는 이름을 쓸 수 없게 했다. 이에 따라 땅이름을 통해 전해진 조상들의 생각까지 접할 수 없게 되었다.

새 주소 체계의 장점을 살리면서 우리의 땅이름들을 살려낼 작은 대안을 내놓으려고 한다. 옛날에 함벽정이란 정자가 있었던 곳인 서울 용산구 원효로4가의 한 도로는 ‘심원정(心遠亭)길’이었다. 새 주소로는 ‘효창원로 8길’인데, 주소판에 ‘심원정길’이란 이름을 괄호 안에 함께 넣어 주는 방식을 고려해 볼 만하다. 이렇게 하면 근처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심원정 근처의 그 길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곳 심원정의 지명도와 가치를 높이고, 길도 더 쉽게 찾을 수 있게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내년이면 새 주소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본격적인 시행에 앞서 주민들의 의사를 감안해 조정을 한 번쯤 거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아울러 우리의 역사와 언어, 민속 등의 연구 보고(寶庫)이며 조상들의 혼이 밴 무형의 유산인 땅이름을 되살릴 방법도 강구했으면 한다.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국가지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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