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권재일]영어 잘하는 나라가 잃어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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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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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국립국어원에는 특별한 손님이 다녀갔다. 히말라야산맥 가운데 위치한 부탄왕국의 국어발전위원회 위원장 일행이다. 외교권을 인도에 위임한 채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써 온 탓에 부탄은 외부 세계에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 불교 국가이며, 가난하지만 국민의 행복지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부탄은 종카어라고 하는 고유언어가 있지만 명목상의 공용어 위치를 차지할 뿐 실제 의사소통은 대부분 영어로 이뤄진다. 부탄은 20세기 초에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47년 인도의 독립과 함께 영국의 지배를 벗어났지만 사회 지도층의 언어는 여전히 영어였다. 1960년대 이후 영어를 기반으로 하는 교육제도를 채택함으로써 현재 지도층은 대부분 영어를 사용한다. 심지어 교육 받은 사람 가운데 종카어로 자기 이름을 쓸 줄 아는 사람은 1% 미만이라고 한다.

부탄 정부는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1986년에 부탄 국어발전위원회를 설립하여 고유언어인 종카어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펼치는 중이다. 그러나 이미 많은 추상적 개념어나 전문용어가 영어로만 통용되고 있어 종카어로는 학문이나 예술 활동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부탄의 국어발전위원회 위원장은 고유언어의 발전과 보급 활동이 특별히 활발하다고 생각되는 한국을 방문하여 국어정책의 현안을 함께 논의하고 해결책에 대한 조언을 듣고자 찾아왔던 것이다.

점점 세력이 커져 가는 영어에 대해 자국어의 존립을 고민하는 나라는 비단 부탄만이 아니다. 지난달 국립국어원은 세계 여덟 나라의 언어정책기관 대표를 초청하여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는데, 프랑스 말레이시아 태국 등 참여했던 여러 나라 대표가 비슷한 고민을 토로했다.

세계화와 정보화에 힘입어 영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언어의 다양성이 빠르게 사라져간다. 이미 많은 나라에서 영어 공용어화가 진행되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고유 언어가 공용어의 위치를 차지해도 앞선 기술이나 학문 분야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심지어 대학 교육을 더는 고유 언어로 하지 못하는 나라도 늘어나고 있다. 결과적으로 기술과 학문 분야의 종속 현상이 일어나고 민족의 고유한 문화가 아름답게 피어날 토양을 잃어버리게 되어 문화는 피폐해지고 민족은 소멸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우리나라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 일상생활에 영어가 깊숙이 들어온 지 오래다. 그리고 몇 해 전부터 영어 공용어화가 공론화되고 있다. 대학에서는 앞다퉈 영어 강의를 장려한다. 이런 현상이 계속될 때 한국도 부탄처럼 우리말 지키는 문제로 고민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유네스코는 생물자원의 다양성 보존 못지않게 언어 자원의 다양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절멸 위기에 놓인 언어를 보존하려 노력한다. 언어란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 역시 유네스코의 언어 지키기 사업에 동참해야 한다. 우리말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국립국어원이 우리말의 보존과 발전을 통해서 우리 문화의 긍지와 자존심을 지켜나가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앞으로 국립국어원은 외국의 언어정책기관과 더욱 돈독히 협력하여 세계적인 자국어 지키기에 힘쓰는 한편, 소중한 우리말이 생활어로뿐만 아니라 전문어로서도 기능을 지켜 나가도록 힘쓸 것이다. 여기에 모든 국민이 관심을 갖고 함께 노력하기를 바란다.

권재일 국립국어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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