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순원]어버이날이면 떠오르는 길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8일 03시 00분


아버지 어머니 안녕하세요. 창밖을 내다보면 바로 요즘이야말로 꽃보다 잎이 더 예쁜 시절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는 우리 시골집 마당도 지금쯤 꽃이 지고 난 자리에 나무마다 연초록의 잎을 활짝 피우고 있겠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가 이렇게 부모님께 편지를 썼던 게 언제였는지, 예전에 대학을 다닐 때 다달이 하숙비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던 게 거의 마지막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때는 바로 송금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그냥 안부 편지만 보내기도 했지요. 며칠 후 다시 장문의 안부 후 ‘드릴 말씀은 다름이 아니오라’라며 송금 얘기를 했던 시절이 있었지요. 후에 문학공부를 하던 시절까지 포함하면 저는 다른 사람보다도 길게 서른이 되어서까지 부모님께 ‘다름이 아니오라’의 편지를 썼던 참으로 늦된 아들이었지요.

돌아보면 꼭 그때만이 아니라 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어머니의 속을 무던히도 썩여드렸던 아들이었지요. 지금이야 지난 시절의 추억처럼 말하지만 이미 중학교 때부터 저는 학교 다니기가 싫어 툭하면 결석을 했더랬지요. 늘 집이 멀다는 핑계로 오늘은 비가 와서,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라며 갖가지 이유를 대곤 했는데 아버지 어머니도 한숨이 나왔겠지요.

“그래도 학교는 가야지. 어미가 신작로까지 데려다주마.” 어떤 날은 어머니가 제 가방을 먼저 챙기기도 했지요. 아버지는 상심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시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무어라고 하실까 봐 얼른 저보다 앞서 집을 나섰지요. 신작로로 가는 산길에 이르러 어머니는 거기에서부터 두 발과 집에서 가져온 작대기를 이용해 내가 가야 할 산길의 이슬을 털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다고 내 옷이 안 젖는 것도 아니었지요. 이슬을 터는 어머니의 옷도 젖고, 뒤를 따라가는 내 옷도 신발도 흠뻑 젖었지요. 아무리 털어도 두 사람 다 젖는다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는 제 학교 길의 이슬을 털어주셨습니다. “앞으로 매일 털어주마. 그러니 이 길로 곧장 학교로 가거라. 다른 데 가지 말고.”

아직 철이 안 들고 어려서였을까요. 고등학교 때에도 저는 대관령에 올라가 농사를 짓겠다고 이태나 학교를 쉬었습니다. 정말 이럴 때 어느 부모가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까, 지금에 와서야 그때 부모님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합니다. 남들은 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아도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언젠가 철이 들면 다시 돌아올 거라고 기다려주셨지요.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묵묵히 지켜봐주시고 어머니께서 이슬을 털어주신 길을 걸어 제가 지금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아버지와 어머니께선 제가 살아온 길 고비 고비마다 길을 내주시고 그 길의 이슬을 털어주셨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학교 길에 털어주신 이슬만 모아도 작은 강 하나를 이루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요즘 다시 아버지 어머니의 걱정과 격려 속에 강원도 대관령에서부터 경포대와 정동진을 잇는 트레킹 코스 ‘강릉 바우길’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들에서도 산에서도 늘 조심해서 걸으라는 아버지 어머니의 전화를 받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혼자 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함께 걷는다는 생각에 마음도 경건해지고 몸도 조심스러워집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하루만이라도 이 세상의 모든 자식이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히 여기는 날인데, 이런 날도 제가 전화를 드리면 아버지 어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자식 걱정부터 하십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저희 자식들은 어릴 때에도, 그리고 나이를 먹은 다음에도 늘 이렇게 부모님의 응원이 필요하답니다. 그러니 더욱 건강하게 부디 오래 저희를 지켜봐 주셔야 합니다.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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