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활]“빨리 브레이크 밟은 것은 오류였다”

  • 동아닷컴
  • 입력 2009년 12월 23일 20시 00분


뉴딜정책을 폈던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는 1937년 대공황의 충격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공공지출을 줄이기 시작했다. 미 중앙은행도 은행의 지급준비율을 인상했다. 이런 긴축정책은 다시 경기침체를 불러왔다. 1938년 미국의 국민총생산(GNP)은 6.3% 줄었고 실업률은 19%로 높아졌다. 미국경제를 ‘고통의 1930년대’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특수(特需)였다.

1990년대 초 거품경제가 무너지면서 신음하던 일본경제는 1996년 잠시 회복세를 보였다. 하시모토 류타로 정부는 1997년 4월 재정건전화를 위해 소비세율을 올렸다. 석 달 뒤에는 “거품 붕괴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 민간 주도 자율회복이 본격화됐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는 ‘하시모토 불황’이라는 내수 위축이었다. 금융 불안도 겹쳐 그해 가을 야마이치증권 산요증권 홋카이도척식은행이 문을 닫았다. 하시모토 총리는 다음해 4월 16조 엔 규모의 부양책을 내놓았고 같은 해 7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경기부양책과 긴축정책은 파급 속도가 다르다. 이른바 ‘쿠퍼 효과’로 부양책에 따른 경기회복은 점진적인 반면 긴축정책 효과는 빠르게 나타난다. 루스벨트와 하시모토의 실패는 ‘낙관의 오류’에 따른 섣부른 출구(出口)전략이 자칫 치명적 후유증을 낳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티머시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은 올해 9월 “과거 경제위기 때 정부가 너무 늦게, 그리고 불충분한 정책으로 대응하고 또 너무 빨리 브레이크를 밟은 것은 오류였다”면서 “우리는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불안과 공포 속에서 출발한 올해 한국경제는 예상을 뛰어넘는 성적표로 한 해를 마감하고 있다. 큰 폭의 뒷걸음질이 예상되던 경제성장률은 주요 선진국들과 달리 소폭이나마 플러스 성장이 점쳐진다. 수출 세계 9위, 무역수지흑자 400억 달러. 외환보유액 2700억 달러도 뿌듯하다. 위기 이후의 세계질서에서 국가 위상이 높아질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재정적자 급증 등 불안요인도 있지만 위기를 헤쳐 나온 우리 기업과 정부, 국민의 역량은 평가받을 만하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이달 10일 “매달 경기와 물가를 짚어가면서 금리인상 타이밍을 잡는 고민을 하겠다”면서 “문 쪽으로 조금씩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 회복세를 감안해 내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출구전략을 검토할 것임을 내비친 것이다. 저금리정책 장기화는 인플레이션과 자산 거품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원론적으로는 옳다. 출구전략 시기를 고심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시장(市場)에 대비하라는 신호를 주는 것도 바람직하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에서 경험했듯 경기 낙관론에 입각한 섣부른 정책 변경이 경제를 다시 얼어붙게 만들어 추가로 재정투입과 금융완화를 반복할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물가 못지않게 경제성장 고용 수출에 미치는 영향도 변수다. 긴축정책 시점을 다소 늦춰 생기는 부작용을 모르진 않지만 너무 서둘렀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리스크가 더 크다.

지금 우리 경제는 경기부양을 위한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때가 지난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브레이크에 발을 올릴 시점인지는 확실치 않다. 당분간 페달에서 발을 떼고 좀 더 달리면서 주변 상황을 충분히 살핀 뒤 브레이크를 밟으면 어떨까 싶다. 적어도 훗날 “그때 너무 빨리 브레이크를 밟은 것은 오류였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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