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승련]대변인들, 유종필의 ‘속죄 글’ 읽어보길

  • 입력 2008년 7월 10일 03시 00분


정치부 기자들은 처음에 놀라지만, 얼마 후에는 여의도 특유의 문화 혹은 관행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당 대변인의 논평이다.

기자가 수년간 접한 정치권 논평 가운데는 합리적 논리와 품격 높은 언어로 작성된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방적인 논리만 취하는 왜곡 과정도 봤고, 이왕이면 매섭고 뼈아픈 표현을 동원해 상대를 겨누는 독기도 느껴 봤다.

그러다 “원래 정치란 게 그렇지”라는 동료의 말을 몇 번 접하면서 ‘왜 달라질 수 없는가’라는 의문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하지만 9일 민주당 출입기자단에 날아든 편지 한 통은 이런 의문이 혼자만의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줬다.

‘비유의 달인’ 혹은 ‘독설의 대가’라는 별명을 얻었던 유종필 전 민주당 대변인은 퇴임 인사를 통해 “저의 말로 상처받았을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대변인 오래 해봤자 말의 악업만 쌓인다. 대변인 오래 할 거 못 된다”고 썼다.

2003년 이후 5년 가까이 대변인을 한 그가 신문과 방송에 인용되는 자신의 말을 즐기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유 전 대변인은 “작은 개가 사납게 짖듯이 저도 사납게 말했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에 대한 집단적 피해의식을 가진 소수야당(옛 민주당)의 대변인으로서 부득이한 측면도 있었다”면서도 “무엇보다도 부덕의 소치”라며 자신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뿐만 아니다. 차영 전 민주당 대변인 역시 8일 마지막 논평을 하면서 “나의 말로 상심한 분들에게 이해를 구한다”고 했다. 나경원 전 한나라당 대변인이나 우상호 전 민주당 대변인도 올봄 물러날 때 “본의 아니게 제 말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으셨거나, 분노한 분들이 계시면 용서해 달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당분간 한국 정당은 상대를 꼬집고 할퀴는 갈등확대형 논평을 계속 내놓을 것이다.

대변인 자신이 상대 정당이나 특정 사안을 보는 생각이 비판적일 수도 있겠지만, 정치를 전쟁 치르듯 하는 현실에서 상대 정파에 효과적으로 상처 주는 ‘매서운 대변인’을 필요로 하는 정당정치 구조도 한몫을 한다.

새로 취임한 민주당의 두 대변인과 한나라당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의 현직 대변인들은 유종필 전 대변인이 남긴 ‘속죄’의 글을 거듭 읽어봤으면 한다.

정치논평의 선진화를 당장 이룰 수는 없겠지만 작은 변화는 이렇게 시작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승련 정치부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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