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정준모]그림, 너의 ‘생얼’을 보고 싶다

  • 입력 2007년 8월 11일 03시 03분


비싼 그림을 사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박수근이나 이중섭의 그림이 미술시장에서 거액에 거래됐다는 소식에 흔히 갖게 되는 의문이다.

어떤 그림일까, 무엇을 그린 그림일까, 어느 시대의 그림일까 하는 질문보다는 누가 그림 한 점에 수십억 또는 수백억 원을 줬을까 하는 데 관심이 집중된다. 문화적 가치는 잊혀지고 재화로서의 가치만 회자되면서 미술품은 ‘아우라’ 없는 일종의 상품으로 전락했다.

미술평론가 로버트 휴스는 “과거에 미술품을 구입한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확인하려 했다”고 말했다. 돈을 벌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사들이는 일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림보다 구입에 들어간 엄청난 돈을 자랑하는 사람은 예전에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거액을 들여 희귀한 미술품을 소장한 사람들에 의해 인류의 중요한 문화유산인 미술품이 잘 보존되는 긍정적 측면이 컸다. 소장한 미술품을 공공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장기 대여하거나 기증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의 미술품 매매에는 ‘돈을 벌어보겠다’는 기대가 무엇보다 우선한다. 미술품을 통한 투자에 성공하려면 유행과 기회에 예민해야 한다. 순발력의 차이에 따라 투자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자연히 모든 관심은 ‘흥행’에 집중된다.

이러다 보니 최근 한국의 미술시장은 정말 난장판이 됐다. 미술인의 처절한 예술 혼 실험 같은 것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오직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미술품은 가격으로 계량화된 하나의 재화에 지나지 않는다. 작품에 대한 외경은 사라진 지 오래고, 대중의 기호와 취미에 잘 맞는 ‘예쁘고 멋진’ 그림만 각광받는다.

개인전 한번 열지 않은 청년작가의 ‘보기 쉽고 달콤한 그림’이 일생을 바쳐 현대미술의 기반을 다져온 노작가 작품 가격의 몇 배에 거래된다. 제대로 된 미술비평 한번 받아 본 적 없는 작가들의 작품을 사려는 사람들이 경매나 화랑에서 번호표를 받아 들고 줄을 서 있다. 얕은 안목에 근거한 시장논리에 미술계 전체가 호도된 것이다.

미술인들도 한몫 거들고 나섰다. 너나 할 것 없이 당장의 호황에 몸을 맡기려 한다. 젊은 작가들의 부화뇌동(附和雷同)에 이어 원로 작가들도 체면과 자존심을 접고 예쁜 풍경화나 집 안 장식용 정물화에 매달리고 있다. 화상(畵商)들은 미술품에 투자하라는 광고와 보도 자료를 연일 뿌려 댄다. 미술시장에서 미술품 한번 사거나 팔아 본 적 없는 미술계 인사가 언제부터인지 갑자기 미술품 투자분석가로 명함을 바꾸어 활동한다.

지금 한국의 미술시장에서는 ‘이발소 그림’의 대체재 정도의 가치만을 가진 미술품만 활발히 유통되고 대중성이 약한 미술은 아무 가치 없는 독백에 그치고 있다. 미술품은 단순히 보는 이에게 시각적 즐거움만 주는 기분 전환을 위한 예술에 불과한 것일까. 재력을 과시하고 사회적 성공을 증명하기 위한 장식품일 뿐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돈을 벌기 위한 한 투자 대상의 하나일까.

음악과 미술 등 인간의 문화가 느끼게 해 주는 공유가치(Shared Value)는 한 사회의 중요한 성장 동력이다.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이며 역사 속에서 한 시대를 규정하는 특성이 된다. 그런데 이런 가치가 뻥튀기 미술시장 속에서 고갈되고 있다. 지구온난화 같은 환경 파괴도 무서운 불행이지만 이런 문화적 빈곤은 민족정신의 대를 끊는 재앙이다.

멋과 풍류, 아취와 정한, 감동과 우수가 없다면 무엇이 인간 삶의 반쪽을 채워 줄 수 있을까.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의 두꺼운 분칠을 지워낸, 그림의 건강한 ‘생얼’이 그립다.

정준모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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