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진우]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 입력 2005년 12월 29일 03시 05분


최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황우석 교수는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고 말해 많은 국민의 공감을 산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과학에는 기만이 없지만 과학자는 기만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고.

사람들은 종종 과학의 진리성과 과학자의 진실성을 혼동하곤 한다. 그러다 이런 믿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면 놀라고 당황하며 심지어 화를 내기도 한다. 과학만은 협잡과 책략이 판치는 영역에서 벗어난 순수하고 투명한 영역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기대를 저마다 조금씩은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줄기세포의 유무를 둘러싼 관련 당사자들의 공방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정치가들의 교활한 언술 못지않게 과학자들의 언술 역시 모순과 오류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해야 했다. 특히 통계나 사진자료에 나타난 명백한 조작을 ‘인위적 실수’라고 완곡어법을 통해 비켜나간 것은 탁월한 ‘수사적 표현기법’의 한 사례로서 우리 지식사회에서 오래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황 교수를 둘러싼 이야기는 그동안 우리가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해 왔던 자연과학적 진리가 실은 얼마나 부실하고 연약한 지반 위에 놓여 있는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는 계몽적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과학 역시 인간에 의해 수행되며 그 인간은 다른 분야의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욕망과 열정 환상 감정 등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학문적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인 선택을 황 교수가 천연덕스럽게 계속해 온 데에는 단순한 인간적 약점이나 일시적 판단 착오 이상의 어떤 운명적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지난 몇 년간 위정자를 포함하여 국민 대다수는 황 교수의 업적에 대해 집단 최면 상태에 빠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는 능력의 은총은 물론 기회의 은총까지 받은 사람이었다. 대중의 관심사와 무관한 상아탑과 연구소의 거주민인 한 과학자가 사회 전반에 걸쳐 이토록 큰 폭풍을 몰고 왔다는 것은 한국 현대사 전체를 놓고 보아도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영광의 절정에서 그는 한순간에 의혹과 비판의 심연으로 추락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한 인간의 지나친 성공은 신들의 질투를 사고 도시를 분열시킨다고 믿었다. 극과 극을 넘나드는 황 교수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바로 이러한 고대인의 지혜를 다시금 상기해 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황 교수를 둘러싼 이야기를 오이디푸스라는 그리스 신화의 내용과 비교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모르고 행한 죄, 즉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 과거사로 자신이 다스리는 도시에 역병을 초래한다. 마침내 자신이 재앙의 근원임을 알게 된 그는 바늘로 자기 눈을 찌르고 장님이 되어 도시를 떠난다. 동유럽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는 이 신화를 공동체 속에서 개인의 책임 문제로 치환해서 읽는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알지 못하고 저지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야기한 불행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를 처벌했다.

그렇다면 현대의 오이디푸스는 어떠한가. 공동체에 손실이나 해악을 끼친 것으로 판명된 뒤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대부분 “나는 몰랐다”는 것이거나, 자신을 대신할 다른 희생양을 지목하는 것이다. 그러나 쿤데라의 말대로 그들은 그것을 정말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몰랐던 척하는 것일까?

사실 관계에 대한 논리적 해명에서부터 도덕적 사죄와 법적 처벌의 감수에 이르기까지 황 교수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황 교수 말고도 ‘자기 눈을 찔러야’ 할 사람은 적지 않다. 쿤데라는 묻는다.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죄가 없는가? 왕좌에 앉은 바보는 바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책임에서 면제되어 있는가?”

우리 시대에 ‘왕좌에 앉은 바보’는 누구인가. 황 교수가 저지른 오류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실적주의에 연결시켜 사회적 병리의 양상쯤으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호도하는 것은 아닌가. 가짜 메시아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거듭 스스로의 눈을 찌르며 안이한 타협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남진우 시인·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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