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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12월 24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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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세야, 잘 지내느냐.
겨울이 깊어 가는구나. 네가 있는 그곳은 늘 여름이어서 네가 좋아하는 흰 눈을 보지 못하겠구나.
민세야, 어제 네 전화 목소리가 좀 무겁더구나. 네 목소리가 조금만 달라도 나는 가슴이 덜컥한다. 잠을 자다가도 네가 그 먼 타국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 눈이 번쩍 떠지고 벌떡 일어나 거실을 서성거리며 거리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너를 생각한다. 잠은 잘 자는지, 먹을 것은 잘 먹는지, 문화가 다른 그곳에서 학교 친구들과는 잘 어울려 지내는지, 같이 지내는 집 식구들과는 잘 지내는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답답할 때가 많아 잠자리를 뒤척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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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세야, 어제는 시골에 계신 할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저녁에 꿈을 꾸셨는데, 할머니 꿈에 내가 두드러기가 어찌나 많이 났던지, 새벽에 깨셔서 잠을 자지도 못하고 계시다가 날이 밝기가 무섭게 전화를 하셨단다. 할머니는 늘 그렇게 당신 꿈자리를 가지고 우리 식구들의 하루를, 안부를, 안위를 점치고 염려하신단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은 참 가난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분가할 때 큰집에서 살림살이 하나 받을 수가 없었단다. 빈손으로 분가하여 집을 짓고, 땅을 사고, 자식들을 낳아 길러 우리들을 이만큼 키워 오신 것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전쟁이 끝나 피란길에서 돌아온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초가집을 짓고 살다가 작은아버지를 낳았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산에서 소나무를 한 그루 두 그루 베어 모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지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4남 2녀 우리 형제자매를 그 집에서 키웠다. 내가 중학교 가고, 작은아버지가 중학교를 순창으로 가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헤어져 살았다. 지독하게 가난한 학교생활이었다. 우리 모두 6년씩 밥과 김치만 먹고 학교를 다녔다.
순창에서 집에 갈 차비가 없어서 토요일이면 12km가 넘는 비포장도로를 걸어갔다. 일주일이 어찌 그리 길던지, 금요일 밤이 왜 그렇게 길던지 토요일 오전 수업은 늘 허둥지둥이었다. 집에 가고 싶었던 거지. 집에 가 봐야 순창 갈 차비나 학교에 낼 돈이 없어 할머니가 이웃마을까지 가서 돈을 빌려야 했지만, 그래도 집에는 가고 싶었지. 이따금 네가 미국에서 전화를 할 때 나는 가라앉은 네 목소리를 들으며 눈시울이 더워져 오곤 한단다. 옛날 순창에서 집으로 오고 싶어 눈물이 나던 때를 떠올리며 말이야.
세월이 갔다.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객지로 간 사람은 용구 작은아버지였다. 서울로 간 것이지. 추석과 설이 되면 작은아버지는 집에 오곤 했다. 작은아버지가 선물꾸러미를 들고 동구 길을 들어서서 집으로 돌아올 때 우리 가족이 보인 그 기뻐하던 얼굴과 몸짓들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단다. 객지에서 돌아온 작은아버지와 우리들이 같이 앉아 있을 때의 그 화기애애함과 기쁨을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 비교하겠니.
그렇게 지내다가 작은아버지가 장가를 갔지. 우리 가족이 한 사람 불어났다. 그 또한 기쁨이었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남의 집 사람이 들어와 우리 집 가족이 된 것이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단다. 그리고 얼마 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사람들이 가족이 되어 살다가 영원한 이별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단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크나큰 상실의 아픔과 슬픔은 할머니에게는 물론 우리에게도 오래오래 계속되었단다. 지금도 한 마을에 태어나 살며 저 험난한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농사를 지으며 자기가 지은 집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일생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눈앞이 흐려 온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얼마 있다가 나도 결혼을 하게 되었다. 네 엄마가 우리 집을 찾아온 것이지. 엄마는 시골에 와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할머니에게서 많은 것을 잘 배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니라 딸과 어머니처럼 자기들을 잘 지키고 가꾸었단다. 민세야, 나는 복이 참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중에서 가장 큰 복은 네 엄마와 할머니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것이,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그 두 사람은 알고 있는 것 같았지. 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인연이 되어 한 가족이 되었으니 잘살자고. 이렇게 만났으니, 기왕이면 잘살자는 게 할머니와 네 어머니의 생활 철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상 어떤 말이 더 필요하겠니?
네가 태어나기 전에 큰고모가 대전으로 시집을 갔다. 얼마 전 큰고모가 크게 아파 우리 가족 모두 슬픔과 걱정으로 많은 날을 보냈음을 너도 알 것이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의 불행은 우리 모든 가족의 뿌리를 흔들어 놓는다.
민세야,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길고 긴 세월이었다. 한 가족이 한 이불 밑에서 살들을 비비며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고 살다가 장성하여 뿔뿔이 흩어져 살며 자기들이 또 한 가족을 이루어 가며 사는 이 과정 속에 그 얼마나 많은 가족의 아픔과 괴로움과 그리고 웃고 울던 행복과 슬픔들이 켜켜이 쌓여 있겠니. 그 어느 가족이든 그 세월들을 들춰 보고 뒤적여 보면 그 얼마나 많은 사연이 그 속에 소용돌이를 치고 있겠니. 다들 그렇게 흩어져 살며 또 일가를 이루어 가며 그렇고 그런 비슷비슷한 사연들을 쌓아 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우리의 소박한 역사인지도 모른다.
네가 태어나고, 또 동생이 태어났다. 너희들이 태어나자 할머니는 자기가 살아온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다 털어내 버린 듯 너희들을 보듬고 살았다. 그렇게 우리는 시골에서 살았다. 할머니 어머니, 너와 동생 이렇게 시골에서 산 세월은 영화 같았지. 내가 학교에서 퇴근하면 엄마는 네 손을 잡고 동생을 업고 커다란 느티나무 밑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나를 기다렸다. 너는 풀꽃을 꺾어 들고 장난을 하다가, 내가 달려가면 너는 내게 달려왔지.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민세야, 네가 고등학교를 담양으로 갔지. 우린 또 헤어져 살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 하게 너는 집으로 전화를 하고, 주말이면 옛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너는 차를 타고 달려왔지. 네가 못 오면 나와 엄마가 달려갔다.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노는 네 모습을 보며 나는 ‘저것이 저렇게 우리를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단다.
할머니는 시골에서, 우리 형제자매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고 너는 이제 더 멀리 떨어져 산다. 가족이 이렇게 사는 게 아닌데, 아닌데 해도, 그래도 민세야, 우리가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 산다고 해도 우리는 흔들릴 수 없는, 부를수록 가슴이 뜨거워져 오는 것이 가족이다. 가족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이 세상의 처음이고 그 끝이고, 어떤 경우에도 마지막까지 버텨야 하는 희망이다. 너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엄마는 늘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고, 사람이 잘살면 얼마나 잘산다고 아이들을 이렇게 멀리 떼어놓고, 보고 싶을 때 못 보고 먹이고 싶은 것 못 먹이고 산답니까. 못살아도 좋아요. 나는 민세를 내 곁에 두고 살랍니다.”
이게 네 엄마의 말이다. 민세야, 나도 그렇다. 엄마와 나는 꼭 너와 같이 살고 싶단다. 이게 내 간절한 소망이다.
너를 그 먼 곳으로 보내고 차를 타고 집으로 오며 나는 속으로 외쳤다. “민세야! 가지 말고 비행기에서 내려 그냥 집으로 와!” 하고 말이야. 머나먼 객지에서 마음고생이 심할 줄 안다. 머지않아 우리 가족이 다 만나 옛이야기로 웃으며 같이 살 날이 꼭 올 것이다. 만날 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라.
2005년 12월 23일 민세가 태어난 마을에서 아버지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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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은
△1948년 전북 임실 출생
△1968년 순창농림고등학교 졸업
△1970년∼ 임실군 내 초등학교 교사(현재 덕치초등학교)
△1982년 창작과비평사 21인 신작시집 작품 발표로 문단 데뷔
△주요 상훈: 김수영문학상(1986년), 소월시문학상(1997년), 제11회 소충 사선문화상(2002년)
△주요 저서: 섬진강(1985년), 맑은 날(1986년), 그대 거침없는 사랑(1993년), 섬진강 이야기(1999년), 시가 내게로 왔다(2001,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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