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화제]한국사랑 34년 크리스텐슨 美부대사 이임

  • 입력 2000년 7월 6일 19시 58분


“정이 많은 한국인들과 나눈 소중한 시간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겁니다.”

주한 미국대사관의 리처드 크리스텐슨 부대사(55)가 23일 4년동안의 부대사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다. 27년의 외교관 생활 중 12년을 한국에서 보낸 미국의 대표적 한국통 외교관인 크리스텐슨 부대사는 5일 오후 서울 세종로 집무실에서 본보 기자를 단독으로 만나 한국을 떠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의 질긴 한국과의 인연은 위스콘신주 마킷대(영문학 전공)를 졸업한 1967년 시작됐다. “고등학교때 E M 포스터의 소설 ‘인도로 가는 길’을 읽으며 평화봉사단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대학졸업후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지요. 주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시 많은 평화봉사단원들이 서울에서 활동했으나 그는 가난한 한국인들을 돕고 싶은 생각에서 시골행을 자원했고 그렇게 인연을 맺은 곳이 전남 목포. 목포 제일중학교와 목포상고에서 2년동안 영어를 가르치며 만난 제자들과의 인연은 애틋하다.

학교가 끝난 뒤에도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가르쳤고 쉬는 날엔 제자들과 통통배를 타고 흑산도 등을 둘러보며 인생공부를 시켰다.

이 가운데 10여명은 지금도 만나고 있고, 지난 번 목포상고 개교 80주년 행사를 비롯해 학교 행사에도 계속 은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많은 ‘아이들’이 생각나지만 다섯 살 때 등대지기를 하던 아버지를 여의고 날품팔이를 하는 어머니와 함께 겨우 생계를 이어가던 학생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함께 수영을 하러 갔는데 가난한 그 아이의 배가 유난히 불룩한 거예요. 처음에는 의아해했으나 나중에 부황으로 배가 불룩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돼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30여년이 지났지만 그때 일을 회고하는 그의 눈가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 공부를 잘하던 그 제자는 현재 서울에서 은행에 근무하고 있고 지금도 좋은 사제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외교관으로서는 한국이 기업과 금융구조조정을 끝까지 완수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은행이나 기업체에서 일하는 사랑하는 제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진짜 아이러니지요.”

처음 인연이 교사여서 그런지 그는 강대국의 고위 외교관이라기보다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숙한 모습으로 서울생활을 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까지 구사하는 그의 한국말 수준은 한국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 부인도 한국인이다. 종로 뒷골목의 허름한 한정식 식당을 즐겨찾는 그와 10분만 마주앉아 얘기하면 그가 외국인이란 사실을 까맣게 잊게 된다. 단골집에 가면 “나는 이 집의 삐끼”라고 너스레를 떨거나, 기자들로부터 난처한 질문을 받으면 “아이 돈 노, 유 돈 노(I don’t know, You don’t know), 피차 돈 노”라고 슬쩍 위기를 넘기는 그를 보면 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인중에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 그는 “30, 40명쯤은 죽을 때까지 연락을 하면서 지낼 것”이라면서도 “절대로 이름은 거명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한 인터뷰에서 몇 명의 이름을 댔다가 거명되지 않은 친구들로부터 엄청나게 혼났다는 게 이유.

외국인으로서는 드물게 고려대 최고경영자 과정까지 이수한 그의 전화번호 수첩에는 무려 450여명의 한국인 이름이 적혀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종종 식사를 함께 할 정도로 친한 사이다.

지난달 29일에는 한미우호협회가 수여하는 제5회 한미우호상을 받았다.

역사적인 남북한 정상회담은 그에게도 감격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는 94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수행해 평양을 방문한 것을 비롯, 북한을 6차례나 방문했다.

남북정상회담은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시나리오에 따라 연출된 연극이었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그는 “한반도에는 이제야 탈냉전시대가 시작됐다”며 “남북한은 더이상 냉전시대의 논리로 서로의 모습을 왜곡하려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는 남북한은 한반도의 주인으로서 남북한 문제를 책임의식을 갖고 해결해야 하며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부대사 재임기간중 가장 보람있었던 일을 묻자 그는 “한국의 IMF위기 극복과 성공적인 남북한 정상회담을 현장에서 지켜본 것, 그리고 훌륭한 한국친구들을 만난 것”이라며 미소지었다.

<신치영기자>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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