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캠페인/특별기고]최인호/투표는 그대만의 선택

  • 입력 1997년 12월 11일 19시 59분


1964년 대학에 갓 입학하였을 때 나는 우연히 김수영(金洙暎)의 「H」라는 시를 읽었어. 그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지. 「…아아, 비겁한 민주주의여 안심하라. 우리는 정치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니야」. 그 한구절이 20대 청춘시절의 내 화두가 되었다. 아아, 그때는 정말 비겁한 민주주의였다. 이른바 조국근대화를 위해 한밤에도 선글라스를 쓴 군인아저씨들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그런 광기의 나날들이었지. 그리하여 우리들은 숨어서 정치이야기를 하고 우리들의 민주주의는 들쥐처럼 비겁하게 숨어서 안심하였어. 바로 그해에 월남 파병이 시작되었고 동시에 내게 투표권이 배달되었다. 무슨 투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되지 않는다. 아마도 국회의원 투표였던 것 같다. 내가 사는 서대문에서는 「오유방」이라는 변호사가 여당 후보로 나오고 「김재광」이라는 야당후보가 나왔지. 투표하던 날 나는 동회에 가서 투표용지를 받았어. 흰 백지였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신성한 백지 위임장이었어. 비록 비겁한 민주주의였지만 내게 주어진 신탁통치의 권한이었지. 그날밤 나는 내가 찍은 후보가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모습을 보았어. 그가 국회의원이 되고 안되고는 나하고는 상관이 없었다. 그때 내가 찍은 그 「붓도장」은 암울한 시대에 내가 자유를 향해 외친 저항이며 웅변이었던 것이다. 그뒤로 나는 숱한 투표를 했지. 대통령 선거, 국민투표, 국회의원 선거, 구청장을 뽑는 지방 선거. 그리고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이 세기말의 저녁무렵 나는 또다시 투표를 한다. 백지 위임장을 받고 일수놀이하는 여편네처럼 「붓도장」을 찍는다. 아아, 3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우리들은 여전히 정치이야기를 하고 여전히 우리들의 민주주의는 비겁하고 여러 손을 주인으로 섬긴 지폐처럼 낡아빠지고 추악하구나. 그러나 젊은이여! 지금의 투표는 저항이 아니라 그대의 자유다. 그대만의 선택이다. 비겁한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우는 길은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으니, 일어나서 투표를 하라. 그대의 손에 들린 백지 위임장은 칼이며 창이며 자유의 깃발이다. 최인호<작가·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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