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갖고 있다” 말한 것만으로 협박죄 성립할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18일 20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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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의 상처는 결국 가라앉지만 리벤지 포르노는 유포되면 모든 게 끝난다.”

팝아티스트 낸시랭이 언론 인터뷰에서 ‘이혼 소송을 진행 중인 남편이 성관계 동영상을 언급했다’며 한 말이다. 가수 구하라 씨는 전 남자친구 최모 씨와 다투는 도중 최 씨가 휴대전화에 저장돼 있던 성관계 동영상을 구 씨에게 전송하자 무릎을 꿇었다.

얼굴이 알려진 유명인 뿐 아니라 일반인 여성들도 헤어지는 남편이나 남자친구가 ‘리벤지 포르노(보복성 음란물)’를 들먹여 고통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성들에겐 헤어진 연인이 성관계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하는 것 자체가 큰 위협이다. 대학생 장모 씨(22·여)는 지난해 헤어진 남자친구에게서 “동영상을 가지고 있으니 넌 영원히 내 꺼”라는 말을 들었다. 장 씨는 “전 남친이 홧김에 한 말이라며 나중에 사과했지만 그 전까지 잠도 못자고 불안에 떨어야 했다”고 말했다.

상대방 동의 없이 성적 유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동영상을 촬영하거나 이를 유포·판매하는 경우에는 성폭력특별법으로 처벌할 수 있다. 하지만 동영상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만으로는 형법상 ‘협박’죄를 적용하기 어렵다. 협박죄는 타인을 해칠 것이라는 구체적인 언행을 동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찬성 변호사는 “협박죄로 검찰에 넘어가도 대부분 불기소, 무혐의가 나오는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가해자가 기세등등해져 피해자들이 불안에 떠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화가 나면 욕설을 퍼붓는 남자친구의 언행에 지쳐 이별을 통보한 박모 씨(30·여)에게 남자친구 김모 씨(35)는 “여행지에서 찍은 동영상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박 씨는 통보 이후 한 달여 간 헤어지지 못했고 원치 않는 성관계까지 해야 했다. 우울증에 탈모까지 온 박 씨는 경찰서를 찾았으나 “기소하기도 어려울 테니 웬만하면 화해하라”는 답을 받았다. 박 씨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김 씨를 상대로 유포금지가처분 신청 절차를 밟고 있다. 담당 변호인은 “영상을 유포하면 이행강제금을 물리도록 하는 민사상 조치를 취하는 게 김 씨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어였다”고 말했다.

법원은 가해자가 “유포하겠다”는 말을 해야 유죄로 인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지난해 전 애인을 성폭행하고 해당 장면을 촬영해 이를 유포하겠다고 협박한 30대 남성에 대해 징역 5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성폭행과 함께 “유포하겠다”고 구체적으로 협박한 정황이 인정됐다. 올해 초에는 18명의 여성과 성관계한 남성이 동의하지 않고 영상을 촬영한 뒤 유포하겠다고 협박한 혐의로 징역 1년2개월을 선고 받았다.

법조계에서는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고려해 성폭력특별법에 자신이 포함된 불법촬영물에 대해 ‘삭제 요구권’을 명시하고 이를 통해 협박하면 처벌하는 내용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서혜진 변호사는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에게 영원한 불안, 고통을 주기 때문에 신체 접촉 성범죄만큼 피해나 고통이 심한 경우가 많다”면서 “피해자의 고통, 범죄의 해악을 감안해서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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