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최창렬/박수치는 언론만 원하나

  • 입력 2004년 7월 11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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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 반대론에 대해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과 퇴진운동으로 느끼고 있다’고 한 다음 날 청와대 브리핑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명시적으로 지목해 ‘저주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고 거친 비난을 퍼부어 댔다.

한국의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 정통성을 가진 자리다. 그런데 대통령은 왜 이리도 자주 진퇴를 거론하는 것인가. 왜 항상 극단적인 편 가르기와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는가. 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것이 왜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이고 퇴진운동인가. 자신의 생각과의 일치 여부를 곧바로 적과 동지의 구분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결코 정치가 아니며 민주주의도 아니다. 이는 또 수도 이전에 대한 찬반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정책비판은 언론 본연의 의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 언론의 의무이자 존재 이유라는, 민주주의의 상식을 새삼 들먹일 것도 없다. 청와대의 논리대로라면 집권세력의 의지를 찬성하고 홍보하지 않으면 언론도 아니요, 굿판의 무당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모든 언론이 용비어천가를 불러야 정상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절반 이상의 국민은 무엇이란 말인가. 정부 정책의 실행 가능성과 타당성을 분석하고 그 결과로 이의를 제기하며, 보다 신중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두고 섬뜩한 용어를 동원해 가며 이렇듯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아무리 헤아려 봐도 집권 세력과 비판 신문의 관계를 최대한 적대적인 방향으로 몰고 가 국민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려는 심사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청와대 브리핑의 지적 중에는 일리 있는 대목도 있을 것이다. 언론도 비판받을 게 있으면 받아야 한다. 굴곡 많았던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영욕의 세월을 함께해 온 언론의 공과는 그것대로 가릴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국가 주요 정책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완전히 별개다. 특정 언론사의 과거를 빌미로 정부정책에 대한 현재 태도를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그런 식으로 과거를 문제 삼자면 권위주의 정권 시절 내놓고 ‘나팔수’ 역할을 했던 일부 언론의 지금 태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정부는 상대적으로 정권을 지지하고 찬성하는 논조를 견지하는 언론과 사안에 따라 감시와 견제라는 언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하는 언론간의 길항 속에서 정책의 균형과 조화를 잡아 가면 된다.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대립구도를 극대화시켜 지지자들의 결집을 유도하는 전략은 여기서 멈춰야 한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언론을 기득권 집단으로 매도하고, 이들과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싸움을 걸려는 태도는 언론자유, 나아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근본을 훼손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다.

수도 이전 문제는 정치적으로 접근할 사안이 아니다. 국가 장래와 국익의 차원에서 백년대계를 생각하며 결정해야 한다. 몇십 년의 세월과 수백조원의 돈이 들어갈 수도 있는, 그야말로 국가지대사다. 현 정권 당대의 문제가 아니요, 현 정권이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그 돈과 노력을 모두 부담해야 할 국민의 입장에서 언론은 얼마든지 시시비비를 제기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저주의 굿판’ 운운은 독재적 사고▼

그 당연한 시시비비를 대통령에 대한 도전으로 매도해 ‘저주의 굿판’이라며 힐난하는 것은 대통령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발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일체의 비판과 반대를 봉쇄하겠다는 지극히 독선적이고 독재적 사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는 한번 사용으로 족하다. 이제 당선 후 1년 반을 넘긴 대통령에게서 승부의 달인의 면모보다는 포용하는 민주적 리더십을 보고 싶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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