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떠났던 선조들⑦]구한말 하와이 농장이민

입력 1998-02-24 19:51수정 2009-09-25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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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후섬의 와일루아에 남아있는 제당공장
“30분 정도의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10시간 일하는 동안에는 허리를 펴거나 담배 피울 겨를도 허락하지 않는다. 루나(하와이말로 감독하는 십장)는 우리들을 마치 소나 말과 같이 채찍으로 다스린다. 노동자들의 이름은 없다. 오로지 죄수와 같이 번호로 부를 뿐이다. 나는 1414번이었다.” 하와이 이민 1세대인 이홍기(李鴻基·74년 사망)옹이 전한 당시 농장생활이다. 구한말 말단 관리를 지냈던 이옹은 한때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의 권사를 맡았다. 이역만리 타향의 길을 택한 구한말 한인들에게 하와이는 더이상 ‘신천지’가 아니었다. 아열대의 따가운 햇볕과 중노동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시밭길’이었다. 20세기 이전부터 이미 하와이를 스쳐간 한인들의 흔적은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공식적인 한인 이민은 사탕수수 농장이민시대로부터 출발한다. 1902년 12월22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한 미(美)상선 ‘겔릭호’는 다음해(1903년) 1월13일 호놀룰루항 제2부두에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는다. 일본 고베(神戶)에서 이민회사가 실시한 1차 신체검사를 통과한 1백2명이 하와이에 도착했으나 이중 86명만이 최종 상륙허가를 받는다. 이후 하와이 이민은 일본과의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1905년 말까지 계속된다. 이 기간 이어진 이민행렬은 총 7천2백26명. 이 중 남자가 6천48명으로 압도적이었으며 부녀자가 6백37명, 어린이가 5백41명이었다. 하와이 농장이민은 19세기말부터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 사탕수수 재배농장의 노동력확보 차원에서 불이 붙었다. 이중 한인들은 이미 하와이에 거점을 확보, 잦은 파업으로 당시 미 농장주들과 껄끄러웠던 중국 및 일본인 노동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농장주들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 미 농장주들은 구한말 정부 각료들과 밀접한 알렌을 통해 이민의 빗장을 풀기 위한 집요한 로비전을 벌인다. 결국 1882년에 체결된 한미통상조약에 근거해 1901년부터 시작된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사업은 1902년8월 민영환(閔泳煥)을 총재로 한 수민원(綏民院)이 설치되면서 본 궤도에 올랐다. 미지의 하와이에 인생을 건 한인들의 직업은 행상이나 기독교인, 군인 등 말단 관리가 주류였다. 일제시대 하와이 한인교회의 산증인인 이동진(李東鎭)목사는 “주로 젊은 20대 청년들이 모험심에 불타서 건너왔다”고 말했다. 한인 이민자들은 하와이의 각 섬에 있는 40여개의 농장으로 분산됐다. 한곳에 30여명에서부터 많은 곳은 2백∼3백명까지 집단 거주하면서 사탕수수 및 파인애플 농사를 지었다. 하와이제도 남단인 빅 아일랜드의 힐로시에서 70년대 중반부터 의사로 일하는 허일무씨는 당시 한인 1세대의 꿈을 이렇게 전했다. “하와이에는 돈나무가 있어 길바닥에 돈이 깔려 빗자루로 쓸어담기만 하면 ‘떼부자’가 된다는 얘기를 듣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건 꿈이었지요.” 그러나 이들의 ‘장밋빛’인생항로는 순탄치 않았다.‘신천지’의 꿈은 금방 깨져버린 것이다. 통역관으로 이민1세대의 농장생활을 지켜본 현순(玄栒)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평안하게 살아왔던 우리 동포가 하루아침에 정든 고향산천과 처자를 버리고 만리나 떨어진 낯선 땅을 찾아 생활방식과 풍속이 다른 지역에서 살아보기 위한 첫 시련은 참으로 고달프고 어려웠다.…심한 노동에 견디지 못하여 그 중 의지가 약한 자들은 심한 사향병에 걸려 생활의 안정을 못찾고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으니, 한 개의 나무상자와 그 위에 잠자리를 얹고 방황하는 사람은 거의가 한인들이었다.”(포와유람기·1909) 이런 이유로 고국으로 되돌아간 한인들만도 9백여명에 달했다. 그러나 한인이민자들을 무조건 농장인부 수준의 노예로 폄훼하는 일방적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계의 견해도 없지 않다. 당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인이 65%나 됐지만 일부에서는 일찌감치 ‘재테크’에 눈을 뜬 선각자도 있었다는 것. 하와이 지주와 대등한 자격으로 땅차용계약을 맺고 열심히 일한 뒤 일정비율의 소작료를 납부하고 남는 이익을 챙기는 이른바 자유협정을 체결하는 이도 있었다. 중노동 이외에 하와이 한인1세대를 괴롭힌 것은 ‘남초(男超)현상’으로 가정을 구성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혈혈단신으로 수만리 바닷길을 건너온 대다수 남성들에게 평생 반려자는 ‘그림의 떡’이었던 것. 이 때문에 일을 마친 뒤 술과 도박, 심지어 아편에 손을 대는 한인들이 급증해 심각한 사회문제로 번졌다. 안정적인 노동력 공급방안을 고심하던 농장주들이 구상한 아이디어가 이른바 ‘사진신부(Picture Bride)’. 수만리 공간을 뛰어넘기 위해 사진 한 장을 주고받고 ‘백년가약’을 맺은 것이다. 당시 조선의 처녀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자유로운 별천지를 찾아보려는 꿈으로 사진속 신랑을 찾아 험한 격랑의 파고위에 몸을 실었다. 1910년부터 1925년까지 이처럼 하와이에 도착한 사진신부는 모두 9백51명. 경남 마산이 고향인 유분조할머니(98)는 현재 생존해 있는 유일한 ‘사진신부’. 꽃다운 스무살에 동네 친구 4명과 함께 ‘사진신랑’을 찾아 바닷길을 오른 때가 1919년. “당시 교회에서 하와이생활에 대한 얘기를 들었어. 지폐가 땅에 굴러다녀 줍기만 하면 되는 별천지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설랬지. 돈을 벌면 남동생을 공부시키려고 했지.” 그러나 막상 하와이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아무리 눈을 씻고봐도 꿈에 그리던 신랑은 보이지 않았던 것. 오히려 눈앞에 있어도 찾지 못했다는 표현이 정확할까. 자신보다 무려 스물두살이나 많은 아버지뻘되는 사람이 사진 속의 신랑이라는 설명을 들은 유할머니는 “억장이 무너져 내렸어”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당시 사진신부들은 대부분 15∼20세 연상의 아버지뻘되는 신랑을 보고 기겁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모두 초창기 이민 때 젊은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고국에 보냈기 때문이다. 속았다는 생각도 들고 분한 김에 한 달 동안 잠자리를 거부했지만 유할머니는 아버지뻘되는 남편 유도범씨가 측은해져 가정을 꾸리게 됐다. 농삿일이 손에 익지 않은 유할머니는 농장노동자들의 옷가지 등을 빨아준 대가로 생활을 시작한다. 차츰 세탁일이 익숙해지자 호놀룰루에 진출, 본격적인 세탁업으로 사업을 확장해 가게를 넓힌다. 모은 돈으로 4남1녀의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보내 남보란듯 번듯한 직장을 다니게 하는 등 ‘또순이’역을 해낸 유할머니는 호놀룰루의 조그만 노인 아파트에서 평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미국내 대학에서 회계학을 가르쳤고 하와이 초대이민사를 연구중인 이상억박사(미국명 새뮤얼)는 사진혼인으로 미국에 온 신부를 네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째 머리가 명석한 처녀, 둘째 열성적인 기독교신앙을 가진 여성,셋째 생활력이 강한 여성, 넷째는 독특한 가정배경을 가진 규수들이라고. 그만큼 사진신부의 등장은 하와이 한인사회의 기틀을 세우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획기적’사건이었다. 이제 하와이 한인사회는 도약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호놀룰루·힐로(하와이)〓정연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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