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레인 메이커’

  • 입력 2000년 6월 29일 12시 08분


▼The Rainmaker(1997,John Grisham 원작)

감독: Francis Copola

출연: Matt Damon (Rudy Baylor) Danny Devito (Deck)▼

'레인 메이커'의 사전적 정의는 문자 그대로 '비를 내리게 하는 사람', 즉 인공비(人工雨)를 만드는 기상과학 전문가를 지칭한다. 이러한 사전적 정의에 덧붙여 "세상에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이란 뜻이 부가되어 통용된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이 단어는 자연신으로 하여금 기우제에 화답하도록 호소하는 제사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비는 자연의 상징이다. 비는 때때로 문명사회를 파멸로부터 지켜주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물질 중심의 고도 산업사회에서 거대 자본의 횡포로부터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레인메이커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어깨가 움츠러진 작은 시민과 법률가가 인간성의 이름으로 대기업과 막강한 법률 팀을 상대로 벌인 외로운 법정투쟁이 민중의 정의를 실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거장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영화 〈레인메이커〉는 당대 최고의 인기 법률소설가 존 그리셤의 작품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다소 산만한 이야기를 2시간 짜리 단일 주제로 박진감 있게 재구성해 내는 솜씨는 다섯 차례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탁월한 경력에 걸 맞는 수작이다.

미국영화에 변호사가 빈번하게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김성곤 교수가 말하는 미국사 회에서 '영웅의 사라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김성곤 영화에세이 1-50쪽). 영웅은 한계적 상황에서 탄생한다. 전쟁과 혁명이 영웅이 출현하는 가장 보편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인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점차 후퇴하고 있다. 이데올로기 혁명도 시대도 급격하게 퇴색하고 있다. 전쟁과 혁명의 자리를 법이 대신 채우고 있다. 새로운 시대 정신은 법제도를 통해 구현되고, 그 제도를 움직이는 법률가는 과거 영웅이 수행하던 역할을 맡는 것이다.

미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법이 국민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곳이다. 20세기 후반 미국의 영웅은 법제도를 통해 반가운 비소식을 가져오는 법률가인 것이다. 이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이 눈을 떠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향한 가치관을 제시하는 일, 그것이 법률가의 역할일 것이다.

미국인의 전형의 하나로 법률가를 들 수도 있다. 시인 오든(W.H. Auden)의 말대로 법이 아침인사이자 저녁인사처럼 지극히 일상의 일부분인 나라다. 경찰과 변호사는 전형적인 미국의 일상의 삶의 일부이다. 또한 미국 사회에서 '법률가'라는 직업이 맡아 수행하는 정반대되는 역할도 법률가가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부차적인 이유가 된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법률가는 세속적 성공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자본주의가 난숙한 미국의 경우는 물질적 성공이 사회적 신분과 결합하여 흔히 "Wall Street 변호사"로 상징되는 기업변호사가 있다.

그러나 미국에는 또 다른 유형의 법률가가 존재한다. 속칭 "거리의 변호사" (street lawyer)로 부르는 일단의 공익법 변호사들이다. 미국의 전체 변호사의 15퍼센트 이상이 코고 작은 인권재단, 법률구조기금 등 공익법 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기에 미국의 생활은 돈과 인권, 어느 측면에서 보아도 법률가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사회적 배경이 갈려 있다.

주인공 루디 베일러(Matt Damon분)는 법과대학을 갓 졸업한 신출내기 변호사다. (원작과 영화 모두) 이야기는 그의 법과대학 졸업반 시절부터 시작한다. 피자를 배달하면서 어렵사리 대학을 마친 후 멤피스 소재 테네시 주립대학 법대에 진학한 것이다. 전형적인 법정소설의 주인공처럼 일류대학 우등 졸업생이 아니다. 지방 대학 법대를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졸업한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소년기에 어두운 그림자를 밟은 상처받은 인간이다. "장래 법률가가 되겠다는 나의 결심은 아버지가 법률가 직업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 돌이킬 수 없이 굳어졌다" 라고 시작하는 원작의 첫 구절에서 작품의 주인공이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 예측이 가능하다. 폭력 대신 냉정한 이성과 논리를 무기로 법정에서 정의를 실현한다는 민권변호사의 꿈을 펴 가는 과정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해병대에 복무한 경력이 유일한 자랑거리인 아버지는 모름지기 사내아이는 매로 다스려야 한다는 소신이었다. 어머니를 폭행하는 아버지에 반항한다는 이유로 멀리 군사학교에나 보내질 팔자였다. 일정한 직업 없이 술주정뱅이로 보낸 아버지가 사고로 죽자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재혼했고 동시에 아들과도 인연을 끊는다.

루디는 졸업과 동시에 저질 법률 사무소에 취직한다. 자신이 '낚아'오는 사건에 따라 수입을 배당 받는, 이른바 '실적급' 계약으로 채용된 것이다. 마침 대학 졸업반 임상수업 과정에서 맺은 인연으로 두 건의 사건을 '가지고' 들어가게 된다. 한 건은 연로한 할머니의 유언장을 작성해 주는 비교적 싱거운 업무였고, 나머지 한 건은 보험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이었다. 비교적 닝닝한 유언 사건은 밑바닥 출신 법학도 루디의 결코 극적이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생활의 배경을 깔아 주는 역할을 한다.

유언 작성을 계기로 알게된 버디여사는 루디에게 방세 대신 정원 손질을 해주는 조건으로 자신의 집에 기거하게 하고, 남편의 폭행으로부터 피하려는 켈리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보호자가 되기도 한다.

한편 보험사건은 성격이 다르다. 법과대학에 진학한 동기를 성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대형 보험회사 그레이트 베니핏사가 백혈병을 앓고 있는 청년에게 보험금의 지급을 거절함으로써 생긴 사건이다.

"위대한 시혜"(Great Benefit)라는 기만의 구호가 이 회사의 정체를 감춘다.

변호사 시험의 합격과 동시에 변론을 맡게된 루디는 소송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 회사가 상습적으로 서민층을 사취하는 악의 존재임을 알게 된다. 신참 루디는 엄청난 경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보험회사가 고용한 일급의 전문 변호사팀을 상대로 싸움을 전개한다. 통산 법정 경험 100년 대 1개월의 경기다.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던 그는 사무장 덱 쉬플릿의 도움으로 유리한 증인을 확보하고 사장의 신문 과정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얻어낸다. 그 동안 몇 차례의 화해의 제의가 있었지만 단호하게 거절한다.

개인적 보상을 넘어선 정의를 원하는 죽음을 앞둔 젊은 환자의 투쟁의식이 이 문제를 사적 권리의 문제에서 사회 구조적 부정의의 문제로 성격을 전환시킨 것이다. 노골적인 소의 기각의 위혐을 가하면서 화해를 종용하는 등 친기업적 성향이 완연한 판사가 돌연 사망하고 민권운동가 출신의 판사가 임명되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 마침내 배심은 원고승소의 평결과 동시에 15만 달러의 손해배상에다 5천만 달러라는 천문학적 액수의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을 명한다. 그러나 그레이트 베니핏 회사의 간부들은 회사재산을 빼돌리고 회사를 파산절차에 끌고 들어간다. 피해자는 한 푼도 수중에 얻지 못했지만 거대한

악을 제거했다. 허무한 종결이지만 원고 어머니의 이야기처럼 "테네시의 작은 여인이 괴물을 죽였다."는 것은 골리앗을 죽인 다윗의 승리처럼 역사에 기록된다.

한 편 루디는 '구급차 쫄쫄이'(ambulance chaser)로 종합병원에 나가 사건을 '낚는'(fishing) 과정에서 알게된 가정폭력의 피해자, 켈리와 사랑에 빠진다. 당초에는 그녀의 처지를 동정하여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해 주려는 인간애의 발로였으나, 그 인간애가 남녀간의 애정으로 발전하고 그녀의 남편으로부터의 탈출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사고로 남편을 살해하게 된다. 그러나 루디를 보호하려는 켈리는 자신이 살인의 혐의를 덮어쓰고 마침내 정당방위로 기소를 면하게 된다. 연인이 된 둘은 법의 세계를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우선 이 영화는 전형적인 법정드라마에서 벗어난 여러 가지 요소를 구비하고 있다. 이른바 '스타' 법률가의 삶이 아닌 평범한 법률가의 길, 도회지가 아닌 지방의 변호사, 결코 일류가 아닌 삶, 그리고 형사사건이 아닌 민사사건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렇듯 '튀지 않는' 법이 오히려 법의 일상적 모습이다. 이 작품이 선택한 소재는 자칫 잘못하면 무미건조하게 느끼기 쉬운 것인데 이를 바탕으로 긴장감 있게 구성한 작가와 감독의 솜씨가 돋보인다. 또한 이 작품은 흔히 간과하기 쉬운 어두운 법의 세계를 비쳐준다. 오로지 바르고 옳은 것만을 추구하는 이상적인 법률가가 되려는 꿈으로 변호사가 된 루디의 앞에는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그가 실무의 세계로 들어가면서 곧바로 악을 조우하고 그 악의 세계에서 승리하는 악의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흔히 영화를 통해 소개되는 법의 천국, 미국에서는 정의는 언제나 승리하며, 그 승리의 과정도 도적적으로 전혀 흠이 없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악마는 악마의 수단으로 무너뜨린다는 보다 현실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그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사무장 데크이다. 여섯 차례나 변호사 시험에서 낙방한 데크이지만 실무의 현장에서 축적한 경험과 타고난 감각이 있다.

그는 법과대학을 갓 졸업한 이상주의자 청년에게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실용주의자이다. 루디가 처음으로 잡은 직장인 "구급차 쫄쫄이" 변호사 사무실을 박차나와 스스로 독립의 사무실을 열게 된 계기도 사무장의 데크의 권유였다.

상대방이 불법으로 자신의 사무실에 설치한 도청장치를 찾아내고 이를 역이용하여 자신에게 불리한 배심을 배척하는 술수를 루디에게 가르치는 것도 데크였다. 직무상 훔친 서류의 법적 효력에 관한 선판례를 찾아낸 것도 데크가 맺고 있던 악덕 변호사와의 연관 때문이었다.

이러한 루디의 타락에 가까운 '사회화의 과정을 이른바 '성장소설'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해 볼 수도 있다. 루디 자신의 독백처럼 그는 시간당 수임료 1천 달러를 받는 변호사들을 증오한다. 처음에는 그 자신이 그런 위치에 이르지 못한 선망과 질시 때문에 미워했으나, 나중에는 그들이 변호하는 의뢰인 때문에 증오한다. 악을 깨기 위해서는 악마의 방법을 이용하는 성인의 세계에 들어온 루디는 자신의 행위가 지니는 사회적 의미를 깨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 서비스산업사회에서 서비스의 상징인 보험회사가 서민을 괴롭히는 착취자가 된 악을 타파하는 첨병이 된다. 승산이 거의 희박한 그의 싸움에 보조법률가인 텍의 실용적 지혜가 가세하고 법제도를 운영하는 판사의 호의적인 눈길과 민중의

준엄한 정의감이 원군이 된 것이다.

소송 도중에 사망한 백인 판사의 후임으로 새로 취임한 흑인판사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인 인물이다. 하버드 출신 민권변호사의 경력 끝에 법복을 입은 판사는 신속한 재판을 위해 비상 (fast tracking)심리를

제안한다. 이를 반대하는 보험회사측에 대해 준엄한 경고를 준다. 영화의 초반에 비춰진 사망이 임박한 젊은 청년이 피를 흘리며 소장에 서명하는 모습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찰스 디킨스의 「음산한 집(Bleak House) 이래 되풀이하여 제기되는 가장 중요한 법의 절차의 문제점은 신속함이다. "사느냐 죽느냐"라는 그 유명한 햄릿의 독백도 "법의 지연"(law's delay)을 감내하기 힘든 고통으로 들었다. 우리 나라의 작가 정을병과 이문열도 형사소송 절차를 고발하는 여섯 가지의 악 "육조지" 중에 판사의 "미뤄 조지기"를 들었다.

작품 중에 배심이 내리는 '징벌적 손해'(punitive damage)는 미국의 사법정의의 원천을 밝히는 중요한 제도이다. 이러한 유형의 손해배상은 다른 나라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미국에 특유한 제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해자에게 발생한 법적 손해로는 가해자의 사악한 행위를 벌하기에 불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민중정의(community justice)의 이름으로 부과하는 것이다. 흔히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따갑게 한다는 뜻으로 "따끔배상"(smart money)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징벌적 손해배상을 산정하는 것은 배심의 전권에 속한다. 이를테면 지역사회의 윤리감을 기준으로 내리는 민중정의의 선언인 것이다.

이 사건에서 그레이트 베니핏 회사는 체계적으로 서민층을 기망, 착취했다. 보험의 모집, 가입절차부터 사기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보험의 청구가 들어오면 일단 지급 거절의 통지를 보내고 가능한 한 지연시킨다는 내부원칙을 세워두었다. 연간 통계를 보면 총 청구건수 중 80퍼센트 이상이 지급 거절되었다. 의료기관과 금전적인 뒷거래를 통한 결탁의 의혹이 짙다.

이 사건에서도 여덟 번째 지급 거절의 통지를 보내며 "당신은 멍청이" (you must be stupid, stupid, stupid") 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치 않고 편지에 담았다. 담당직원이 재판에 소환될 상황에 처하자 그녀를 해고하면서 궁박한 상태를 이용하여 자발적인 것으로 위장한 사직서를 받았다. 게다가 여성직원의 승진의 중요한 요건 중에 상관과의 섹스가 포함되어 있다. 이 모든 악행은 징벌적 손해배상이 아니고서는 적절하게 징계할 수가 없다.

그레이트 베니핏의 파산으로 루디도 유족도 수중에 한 푼도 건지지 못한다. 허무한 종말은 테네시의 한 여인이 괴물을 죽임으로써 희망의 비를 내리게 했다는 사회적 성취로 보상받는다. 이 과정에서 루디는 어두운 자신의 과거의 악몽을 극복하다. 연인을 만나 그녀와 함께 새로운 시작을 위해 법 밖의 세계로 떠난다. 아버지에게 맞는 어머니를 무력하게 쳐다보기만 해야 했던 유년시절의 악몽을 남편의 폭력의 세계로부터 켈리를 구출함으로써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은 법이라는 어른의 의식과 절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경환<서울대 법대 교수>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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