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마을 현장을 가다 6]플라넷 파이낸스

  • 입력 2002년 8월 4일 17시 35분


《플라넷 파이낸스(PlaNet Finance). 이름에서 드러나듯 ‘지구(Planet)’적인 ‘네트워크(Network)’를 가진 ‘금융(Finance)’ 기관 성격의 비정부기구(NGO)다. 파리에 본부를 둔 플라넷 파이낸스는 빈민을 상대하는 전 세계 7000여개의 소액금융기관(MFI·Micro-Finance Institution)에 대한 대출 및 지원을 통해 빈민을 구제한다는 원대한 꿈을 실현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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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자선’ 세계의 富를 나눈다▼

그 거창한 이름이나 포부와는 달리 파리 본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바스티유극장 인근의 허름한 골목을 헤매다 차고 같은 문 옆에서 작은 간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둡고 좁은 복도를 지나 본부 사무실의 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여느 프랑스 직장이라면 대부분 퇴근했을 오후 5시반이었지만 30여명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반갑게 맞는 홍보 책임자 카롤 비아네메에게 “아직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고 했더니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면 이렇게 못한다”며 웃었다.

30평 남짓한 이 사무실이 해온 일은 놀랍다. 창립 3년 만인 지난해 세계 400개 MFI에 300만유로의 돈과 컴퓨터 장비 등 500만유로(약 58억원) 상당을 빌려주거나 지원했다.

MFI 하나에 1만∼5만유로 정도의 지원이지만 이 돈은 극빈자들에게 100유로(약 11만5000원) 이하의 대출금으로 쪼개져 ‘엄청난 일’을 해낸다.

‘10만원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세계 인구의 절반인 30억명이 하루 2달러(약 2300원) 이하로 생활하는 현실 앞에서 한없이 배부른 얘기다. 실례를 들어보자.

플라넷 파이낸스는 MFI의 하나인 필리핀의 ‘바바 재단’에 1만달러를 빌려줬다. 이 돈 가운데 60달러가 레티시아 에스피나라는 소득이 전혀 없던 극빈 여성에게 대출됐다. 에스피나씨는 그 돈으로 재봉틀을 한 대 사서 천으로 된 신발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이제 에스피나씨는 자신의 사촌까지 고용해 매달 150달러를 벌어들이는 자영업자가 됐다.

토고에 사는 마리아마라는 여성은 아침에는 밀빵을, 저녁에는 옥수수빵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그는 ASDEB라는 MFI로부터 4만원가량을 대출 받아 빚으로 사던 빵 재료 등을 현찰 도매가로 사기 시작했다.

재료를 한 번 구입할 때마다 50원가량을 아끼게 됐고, 빚으로 재료를 산 뒤 빵을 팔아 빚을 갚는 악순환의 고리도 끊어졌다.

비아네메씨는 지난 3년간 MFI를 통해 플라넷 파이낸스의 직간접 지원을 받은 전 세계 극빈자는 80개국의 300만명가량이라고 말했다.

플라넷 파이낸스의 재원은 유럽연합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의 보조금과 대기업 일반인의 기부가 대부분. 파리 본부는 금융시장 등을 통해 이 돈을 굴려 MFI에 대출해 준다.

2000년 150만유로였던 플라넷 파이낸스의 MFI 대출 지원금은 지난해 300만유로로 두 배가 됐다. MFI 대출금도 상환받고 기부가 늘면서 플라넷 파이낸스이 사업규모도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플라넷 파이낸스는 2005년까지 5억명의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의 극빈자에 자활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놀라운 일은 이런 사업을 거의 전적으로 인터넷에 의존해서 벌이고 있다는 점. 파리 본부의 직원은 유급 10명에 자원봉사자 40명 등 50명에 불과하다.

미국 영국 이탈리아 벨기에 인도 모로코 베냉 등 7개국 지부 직원과 자원봉사자를 합쳐도 300여명. 플라넷 파이낸스는 범세계적인 조직이지만 일하는 사람 수로만 보면 인터넷상의 작은 공동체에 불과하다.

이 적은 인원이 인터넷을 통해 기부도 받고 금융시장에서 펀드를 굴리며 각국 MFI에 대한 대출업무 등을 처리한다. 플라넷 파이낸스의 온라인 대학을 통해서는 MFI 종사자들에게 금융기술을 전수하고 정보기술(IT) 훈련을 시킨다.

플라넷 파이낸스는 관료조직이나 큰돈 없이도 얼마든지 국제적인 기구나 조직을 운영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또한 소규모 NGO도 세계적인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실증해 보였다.

플라넷 파이낸스의 의장인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 전 유럽부흥은행 총재는 “플라넷 파이낸스 운동은 ‘제7의 대륙 발견’에 해당하는 인터넷의 출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인터넷을 통해 세계 7000개 MFI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금융기관 성격의 빈민구호 NGO를 창설한다’는 구상은 아탈리 전 총재 같은 천재가 아니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아탈리 전 총재는 97년 11월 한 세미나에서 플라넷 파이낸스 구상을 발표했다. 유럽의회의 고용 사회문제 위원장이던 미셸 로카르 전 프랑스 총리와 마시모 폰젤리나 유럽투자은행 부회장 등이 즉각 공감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여기에 금융인 출신으로 NGO 운동을 하던 아르노 방튀라 현 플라넷 파이낸스 사무총장이 가세해 98년 10월 플라넷 파이낸스 본부가 발족됐다.

세계은행과 다국적 대기업 등 세계화의 첨병 역할을 하는 기관의 지원을 받아 세계화의 그늘에 가려진 빈민들을 돕는 것도 이채롭다. 플라넷 파이낸스에는 오라클과 마이크로소프트, 비벤디 유니버설 등 세계적인 대기업이 파트너로 참여해 자금 지원은 물론 각종 컴퓨터 장비와 기술 등을 제공하고 있다.

방튀라 사무총장은 “플라넷 파이낸스는 피할 수 없는 세계화와 대안 없는 반세계화 사이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제3의 길’”이라고 말했다.


▼“세계화의 明暗 상쇄하는 시도”▼

자크 아탈리 전 유럽부흥은행 총재가 플라넷 파이낸스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뼈대를 세운 인물이라면 금융인 출신의 아르노 방튀라 사무총장(사진)은 조직을 실제 운영하며 살을 붙여온 사람이다.

4년 전만 해도 잘 나가는 금융인이었던 방튀라 사무총장은 플라넷 파이낸스의 펀드 운용은 물론 조직과 기술교육 등을 총괄하고 있다. 다음은 파리 본부에서 만난 방튀라 사무총장과의 일문일답.

-플라넷 파이낸스와 소액대출로 유명한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의 차이는 뭔가.

“그라민 은행는 영세 자영업자 등을 상대로 대출을 해 주는 소액금융기관(MFI)의 하나다. 플라넷 파이낸스는 그 같은 MFI에 대출과 지원을 해 준다. 직접 빈민에게 대출을 하지는 않는다.”

-세계화의 첨병인 대기업들의 지원으로 세계화의 그늘에 가려진 빈민을 지원하는 것은 모순 아닌가.

“세계화는 피할 수 없다. 지난해 플라넷 파이낸스는 모로코 지부를 통해 수제 관광상품을 만들어 파는 빈민들에게 대출 지원을 했다. 외국 관광객이 물건을 사지 않는다면 이들 영세업자들이 어떻게 자립할 수 있겠는가. 세계화로 혜택받은 기업들이 세계화의 그늘에 가려진 빈민들을 돕는 것은 세계화의 균형을 맞추려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일반인의 참여는 어떤가.

“아직은 미미하다. 플라넷 파이낸스의 총 수입 가운데 15만유로(약 1억7000만원)가 일반인의 기부를 통해 모금됐다. 아직은 유럽연합(EU)과 세계은행(WB) 등의 보조금과 대기업의 후원금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일반인이 플라넷 파이낸스에 기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운동에 관심있는 사람은 인터넷 사이트(www.planetfinance.org)를 방문하기 바란다. 인터넷을 통해 원하는 금액을 특정 지역이나 프로그램을 지정해 기부할 수 있다.”

-인터넷으로 세계적인 조직을 구축한 것이 놀랍다.

“우리는 온라인을 통해 전 세계 160개 MFI에 금융 기술과 컴퓨터 교육을 시켰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본부와 MFI를 연결하고 MFI 종사자들을 교육시키는 데만 엄청난 전화료와 여행비가 들었을 것이다.”

-왜 이 일을 하게 됐나.

“4년 전에는 BNP은행의 아르헨티나지사에서 일했다. 막연히 사람들을 돕고 싶어 서부 아프리카의 비정부기구(NGO)를 지원하려는 ‘NGONET’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했다. 그러던 중 ‘함께 일하자’는 자크 아탈리 전 총재의 e메일을 받았다.”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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