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국민의 정부]<35>4부 ①실패로 끝난 한미정상회담

  • 입력 2003년 9월 3일 17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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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첫 한미정상회담은 성공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정부 당국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한미갈등을 드러내는 자리가 됐다. 김 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2001년 3월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첫 한미정상회담은 성공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정부 당국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한미갈등을 드러내는 자리가 됐다. 김 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2001년 3월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이번 한미정상회담 결과는 깜짝 놀랄 정도로 만족스러울 것이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세계 유일의 현직 대통령이다. 노벨상의 권위가 어떤 것인가. 세계의 모든 지도자가 DJ를 만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한미정상회담을 1개월여 앞둔 2001년 2월 어느 날. 김하중(金夏中·현 주중대사)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기자 간담회에서 3월 7일 열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 전망에 대해 이렇게 확신에 가득 찬 대답을 했다.

갓 취임한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앞서 우리 정부에는 이런 자신감이 한껏 고조돼 있었다. 부시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첫 정상회담 파트너로 DJ를 택했다는 사실도 정부를 고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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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리자 이런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외교 관계자들의 평가대로 회담은 ‘대미 외교의 참화(慘禍)’로 기록될 만했다.

부시 대통령이 정상회담 자리에서 DJ를 ‘이 사람(this man)’으로 지칭하고 대북대화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DJ에게 “북한에 대한 의구심(skepticism)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은 TV 화면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정부는 이런 결과를 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정부 관계자들은 “정상회담 한 달 전에 열렸던 한미외무장관회담이 너무도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정상회담을 낙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한다.

실제로 한미외무장관 회담은 엎치락뒤치락 곡절은 있었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2월 7일의 한미외무장관회담을 앞두고 한미 실무자간에는 날카로운 신경전이 벌어졌다.

외무장관회담 하루 전 에드워드 동 미 국무부 한국과장은 한국측 카운터파트인 위성락(魏聖洛·현 외교통상부 북미국장) 주미대사관 정무참사관을 국무부로 불러 미국의 입장을 전했다.

거기에는 DJ 정부의 최대 관심사항인 햇볕정책 등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그저 한미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통상적 내용만 담겨 있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받을 수 없다. 도대체 외무회담에서 뭘 논의하자는 거냐.”

“미 정부의 입장은 이것이 전부다. 더 이상 바꿀 게 없다.”

한동안 말다툼을 벌이던 위성락 정무참사관은 “나로서는 이 내용만을 본국에 보고할 수 없다. 대신 우리 선에서는 해결이 안 되니 윗선에 그대로 올려서 다시 협의하자”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회담을 불과 하루 앞두고 사실상 ‘파탄’에 가까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급반전됐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한국 정부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주라고 미 국무부 실무자들에게 지시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당시 이정빈(李廷彬) 외교부 장관과 파월 국무장관의 외무회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DJ 정부에서의 남북관계 진전을 긍정 평가하고 한국의 대북화해협력정책에 대한 지지 및 긴밀한 한미공조체제 유지라는 내용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은 엉뚱한데서 꼬이기 시작했다. 2월 27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러 정상회담에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 조약의 보존 강화’ 조항이 포함된 공동성명을 낸 것이 미국 측을 자극했다.

뉴욕 타임스가 “DJ가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계획(NMD) 체제 구축 논란과 관련해 공개적으로 러시아편에 섰다”고 보도하자 ABM 체제를 NMD로 대체할 계획이었던 미국측이 반발하고 나섰다.

‘ABM 파문’은 DJ가 한미정상회담에서 상당시간을 이 문제에 대한 오해를 푸는 데 할애할 정도였다.

당시 이 문제에 관여했던 A씨의 증언. “ABM 관련 문구는 서방선진 8개국(G8) 정상회의에서 이미 나온 표현인 만큼 아무 문제가 없다고 밀어붙일 수도 있었는데 우리 정부는 미리 무릎을 꿇었다. ABM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혼선 속에서 대응하다 보니 파문이 확산된 것이다.”

또 하나의 사건. 한미정상회담이 열리기 하루 전 미국의 유력 일간지인 뉴욕 타임스는 북한문제에 대한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여기에는 웬디 셔먼 전 미 대북정책조정관의 기고문이 실려 있었다. 요지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유산을 부시 행정부가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침 기자들을 만난 파월 국무장관은 ‘이 보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하겠다”며 “우리는 클린턴 전 대통령이 중단한 곳에서 시작하기 위해 북한과 접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파월 국무장관의 답변은 클린턴 정권의 접근 방식을 계승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파월 국무장관의 이 한마디는 부시 진영 내 강경파들의 반발을 불렀다. ABC(Anything but Clinton·클린턴의 정책만 아니면 모든 것을 수용한다) 정책을 갖고 있던 강경파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면서 파월 국무장관의 입지가 급격히 축소됐다.

외교 관계자 B씨의 설명. “한미정상회담이 시작됐는데 미국측 배석자들의 자리 배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 세 명이 나란히 앉았는데 이들과는 거리를 두고 파월 국무장관이 간이의자 같은 데 앉아 있었다. 더구나 파월 국무장관은 회담 중간에 자리를 떴다. 그래서 화장실을 가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기자회견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회담장을 떠난 파월 국무장관은 백악관 마당에서 기다리던 기자들을 만나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안보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 미사일 개발을 포함한 현안에 대한 협상을 즉각 재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은 남북한의 평화협상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해 아직까지 조심스러운 견해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강온파의 힘겨루기에서 밀린 파월 국무장관은 한미정상회담에 제대로 끼지도 못하고 하루 만에 자신의 발언을 번복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외교소식통 C씨는 “정상회담 직전만 해도 미 정부 내 강온파간의 대립이 구체화되기 전이었다. 파월 국무장관도 꿈틀거리는 강경파의 기류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발언을 뒤집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고 말했다.

이유와 배경이야 어찌됐든 한미정상회담의 실패를 계기로 북-미대화 재개 문제는 쑥 들어가고 남북관계도 뒷걸음질쳤다. DJ정부 청와대 관계자들은 뒤늦게 “부시 행정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가 너무 자만했다”고 자성론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부시캠프 파이프 연결하라”▼

조엘 신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조지 W 부시 후보가 당선되자 우리 정부에는 비상이 걸렸다.

미 대선이 진행되는 동안 ‘민주당 앨 고어 후보의 당선이 남북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올 만큼 DJ 정부의 분위기는 ‘민주당 편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정상회담을 최대한 빨리 열어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 우리 정부의 급선무였다. 정부는 이를 위해 한국계 2세로 부시 후보 선거 캠프에서 외교안보분야를 담당했던 조엘 신에게 매달렸다.

부시 대통령이 취임 후 첫 정상회담을 DJ와 갖게 된 것도 조엘 신의 결정적인 도움 덕분이라는 게 주미 한국대사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그는 1996년 대선에서 밥 돌 공화당 후보를 위한 선거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공화당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인물. 부시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는 정권인수위원회의 국무부 업무 인수 연락책(외교안보분야 간사)으로 일했다.

주미한국대사관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당시에는 콜린 파월 미 국무부 장관도 의회 인준을 받지 못한 내정자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 정부의 중요한 문서들을 조엘 신을 통해 파월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며 “한미정상회담을 조기에 개최하기 위해 필요한 한미외무장관회담 제의도 그를 통해 파월에게 전달됐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우리 정부의 메시지도 조엘 신을 통해 전달될 정도였다는 후문이다.

정부가 조엘 신과 처음으로 접촉을 갖기 시작한 것은 미 대선전이 한창이던 2000년 초여름.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은 부시 후보의 선거캠프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리스트를 뽑아보고 그를 눈여겨보게 됐다. 외교관계자는 “조엘 신은 선거기간 에 콘돌리자 라이스가 외교안보문제에 대한 보고서들을 정리해 가져오면 이를 다시 요약해 부시 후보에게 직접 전달하는 일을 했다”고 그의 역할을 설명했다.

주미한국대사관측은 조엘 신과 접촉하기 위해 여러 차례 e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하는 노력 끝에 간신히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 외교관과 조엘 신의 첫 접촉은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이뤄졌다. 조엘 신은 당시 미국 대선전의 이슈로 떠오른 북핵 문제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에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과 북한의 동향에 큰 관심을 보였다.

우리 정부도 부시 후보의 집권 가능성에 대비해야하는 만큼 조엘 신의 요청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후 접촉이 계속되면서 조엘 신은 부시 후보 선거 캠프 내에서 자연스럽게 우리 정부의 연락 통로 역할을 하게 됐고 그 인연이 한미정상회담 막후교섭까지 이어졌다.

정부 관계자는 “조엘 신은 2000년 미국 대선 직후 상황에서 한국 정부와 부시 대통령 진영을 연결해준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고 말했다. 조엘 신은 부시 행정부에는 진출하지 않고 민간 연구기관인 스코크로프트 그룹에 들어가 현재 외교안보 관련 컨설팅 업무를 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팀장=이동관 정치부장

▽정치부=반병희 차장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명건 이승헌 기자

▽경제부=홍찬선 박중현 김두영 기자

▽기획특집부=윤승모 차장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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