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88>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25일 18시 19분


코멘트
漢王이 되어(11)

하후영이 그렇게나마 아는 척 해주자 한신은 더욱 기가 살아났다. 묶인 중에도 낯빛에 위엄을 살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왕께서는 천하를 얻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말자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장사(壯士)를 한번 써 보지도 않고 함부로 죽이려 하십니까?”

“장사를 함부로 죽이다니? 나는 벌건 대낮에 떼를 지어 마을로 내려가 백성들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부녀자를 겁탈한 죄수를 목 벤다는 말은 들어도 우리 대왕께 천하를 얻어줄 장사를 죽이고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그럼 네가 바로 그런 장사란 말이냐?”

그제야 하후영이 한신의 죄목을 기억해내고 그렇게 차게 말했다. 그래도 한신은 기죽지 않고 받았다.

“나는 위로는 천문(天文)을 읽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알며 또 그 아래와 위를 이어주는 사람의 마음(人心)을 부릴 줄도 압니다. 아녀자처럼 다감한 마음으로 고향을 그리며 동쪽으로 돌아가는 패왕은 천하를 담을 그릇이 아니라 여겨 그를 버리고 한왕을 뒤따라 왔으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바로 써주지 못하니 이는 곧 장사를 함부로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할 일도 없는 연오(連敖)가 되어 술로 기구한 팔자를 달래다 군율을 어겨 이리 되었으니, 그것이 어찌 반드시 이 한신의 죄이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넉살맞은 데까지 있었으나 하후영은 왠지 그런 한신이 밉지 않았다. 거기다가 허여멀쑥한 얼굴과 크고 우람한 몸집도 이름 없는 죄수로 죽을 팔자 같지는 않았다. 먼저 아직도 새파란 얼굴로 집행을 재촉하는 관영을 찾아가 한신의 목숨부터 살렸다.

어자(御者·마부)가 하는 일은 윗사람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이라, 모시는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내고 그 상대를 알아서 대접해주어야 했다. 그러려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는 재주가 필요한데 하후영에게 바로 그런 재주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패현의 마구간에서 자라고 현령의 수레를 몰았으며, 한왕을 따라나선 뒤에도 줄곧 그의 말과 수레를 몰아 사람을 보는 눈을 길러온 까닭이었다.

한신을 형틀에서 풀어내 제 군막으로 데려간 하후영은 다시 술상을 내어 그의 놀란 가슴을 달래주며 물었다.

“공은 항왕이 동쪽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그가 천하를 담을 그릇이 아니라고 보았소. 패왕을 감히 갓 쓴 원숭이(沐후而冠)에 비하다가 죽은 한생(韓生)과 같은 뜻인 줄 아오. 또 공은 항왕의 위세에 눌려 파촉 한중으로 몰리는 우리 대왕에 오히려 앞날을 걸고 뒤쫓아 왔으니, 이는 파촉 한중에서 힘을 길러 뒷날을 도모하자는 우리 소(蕭) 승상의 뜻과 같소. 한생은 관중에서 학식 높기로 이름났고, 소 승상은 우리 한군(漢軍) 중에서 가장 살핌과 헤아림이 밝은 분이오. 그 같은 이들과 뜻을 같이 하니 공의 높은 안목을 알 수 있거니와, 그밖에 공은 특히 무슨 재주가 있소?”

“하늘과 땅과 사람의 모든 것을 공부하였습니다만 특히 시절이 어지러운 걸 보고 병법(兵法)을 공들여 익힌 바 있습니다.”

한신이 그렇게 대답했다. 아직도 그 말투에는 허풍스러운 데가 남은 듯해 하후영이 다시 물었다.

글 이문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