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가는 임 오는 임'

  • 입력 2003년 2월 24일 19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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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임 배웅하고 오는 임 마중하면 될 일이거늘 아무래도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다. 속이 헛헛한 듯도 싶고, 명치께가 꽉 막힌 듯도 싶은 것은 한낱 부질없는 감상인가. 안타까운 노릇이다. 반세기 헌정사에 국민의 따뜻한 박수를 받고 떠난 대통령이 한 사람도 없다니. 망명하고, 피살되고, 감옥 가고, 나라경제 거덜내고…. 그리고 어제 김대중(金大中·DJ)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났다.

5년 전 그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절반의 성공’이란 평가에 그나마 위안받아야 할 처지다. 물론 역사의 평가는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역사에 맡기기 전 그가 스스로 풀어야 할 매듭이 있었다. ‘대북(對北) 뒷거래’ 진상이다. 나는 특검제가 만능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따라서 DJ와 그의 참모들이 이 문제를 스스로 풀어주기를 바랐다. 남북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해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국민 다수가 ‘그 정도면 됐다’고 할 정도는 얘기해야 했다. DJ는 그렇게 하고 떠나야 했다.

▼‘그 돈을 대체 어디에 썼을까'▼

이제 부담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몫이 됐다. 자칫 새 정부가 이 문제로 몇 달씩 발목이 잡힐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진상규명을 피해 갈 수는 없다. 대북관계의 투명성 확보야말로 시급한 국가적 현안이기 때문이다. 대북관계가 투명하지 않고는 앞으로 남북협력은 물론 한미공조도 매끈하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미 국무부 관계자는 며칠 전 “우리는 때때로 북한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얻은 현금을 어디에 소비하는지에 관해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써 돌려 말했다고는 하지만 ‘그 돈이 핵 개발에 쓰인 것 아니냐’는 강한 의구심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나는 “전쟁을 막고 불안을 없앨 수 있다면 미국과 다른 의견도 말해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주장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다른 의견’은 대북거래의 투명성이 담보될 때 당당할 수 있다. 대북 비밀송금의 진상 규명은 무엇보다 평양정권이 이제 더는 뒷거래로 현찰을 챙길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하는 데 필요하지만, 새 정부의 당당한 대미(對美) 외교를 위해서도 불가피한 일이다.

1998년 6월 16일 고(故)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은 소떼를 몰고 북으로 가면서 “이제 한 마리의 소가 1000마리의 소가 돼 그 빚을 갚으려 고향산천을 찾아간다”라고 했다. 강원 통천군 고향집에서 부친의 소 판 돈 70원을 몰래 갖고 가출했던 사연에 소떼방북을 빗대 말한 것이다. 그러나 ‘왕회장’은 감동적인 어록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북행 우등버스’의 핸들을 잡았다. 남북문제에 정통한 한 관료 출신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대북거래의 루트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DJ가 ‘현대 버스’에 편승한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DJ로서는 기왕에 출발한 현대 버스를 타면 대북관계를 트는 데 유리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정 명예회장은 DJ를 버스에 태우면 가다가 설마 뒤집어지는 일이야 있겠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북측이 버스 운행에 큰돈을 요구했다면 차주가 승객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벌리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따라서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에서 대출받아 보낸 2억달러가 남북정상회담용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어차피 한 데 묶인 것일 테니까.”

▼통일문제 ‘히트상품’ 아니다▼

이 인사는 어떤 지도자든 통일문제로 짧은 기간에 히트를 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통일의 기반을 닦은 대통령이란 재임 중 치적에 집착해 서둘러 뭔가를 보여 주려고 해서는 1인 지배체제로 그 본질이 변하지 않은 북의 페이스에 말려들 수 있다. 가장 훌륭한 통일정책은 권력의 부정부패를 없애고 빈부 갈등을 줄여 나가는 등 남한체제의 우월성을 강화해 북이 남을 반대할 명분을 없애는 것이다.”

햇볕정책의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는 임’ DJ의 햇볕은 이제 검증되고 보완돼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라도 대북 뒷거래의 진상을 가려야 한다. 다만 정파적 이해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남북관계의 투명한 새 질서를 만들기 위한 소중한 계기가 되어야 한다. ‘오는 임’ 노 대통령은 이 일을 해내야 한다.

전진우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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