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 국민들 “경찰 있으나마나”… 호랑이 우리에 금고 숨겨놓기도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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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대선 한달 앞〈중〉 망가진 경제, 무너진 치안
좌파 정권, 범죄 급증에 속수무책
대도시 빼곤 강도-약탈 무법천지
경찰 평균 연봉 1500만원 그쳐

‘11세 소녀 등굣길 피살’에 분노한 시민들 지난달 9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시민이 등굣길에 강도를 만나
 목숨을 잃은 11세 소녀 모레나 도밍게스의 죽음에 따른 대책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노란색 종이 위에 모레나의 얼굴 
사진과 ‘정의’ 문구를 넣어 치안 악화를 수수방관하는 정부를 규탄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AP 뉴시스
‘11세 소녀 등굣길 피살’에 분노한 시민들 지난달 9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시민이 등굣길에 강도를 만나 목숨을 잃은 11세 소녀 모레나 도밍게스의 죽음에 따른 대책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노란색 종이 위에 모레나의 얼굴 사진과 ‘정의’ 문구를 넣어 치안 악화를 수수방관하는 정부를 규탄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AP 뉴시스
“도둑질에 신물이 난 주민들이 직접 도둑을 잡아 경찰에 넘겼다.”

아르헨티나의 치안 불안은 경제난 못지않게 심각한 사회 문제다. 14일 현지 언론 인포바에 등은 “차코주(州) 레시스텐시아 주민들이 치안 불안을 용인하는 당국의 방관에 지쳐 직접 행동에 나섰다”고 전했다. 곳곳에서 강도, 약탈 등의 중범죄가 만연하고 치안 강화를 요구하는 시위 또한 잇따른다.

지난달 9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11세 소녀 모레나 도밍게스는 등굣길에 괴한 습격으로 숨졌다. 마약 구매를 위한 돈이 필요했던 범인들은 어린 소녀의 가방을 빼앗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도밍게스는 머리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처참하게 희생된 어린 생명 앞에서 전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도 현 정권이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것 또한 정권 교체 여론을 부추기고 있다는 평가다.

● “수도권 벗어나면 베네수엘라”
최근 현지 소셜미디어에는 괴한들이 상점에 집단으로 침입해 물건을 닥치는 대로 쓸어가는 모습이 자주 올라오고 있다. 괴한들을 향해 총을 쏘는 가게 주인도 등장했다. 호랑이 우리에 숨겨놓은 금고를 훔치려고 맹수 우리에 뛰어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강도가 있는가 하면 일부 도둑은 유골함까지 털고 있다. 특히 지난달 초(超)인플레이션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기습적으로 페소 가치를 18% 긴급 절하하자 약탈이 더 기승을 부린다.

치안 불안은 경제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르헨티나는 1950년대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무려 29차례 받았다. 가장 최근인 2018년에는 국내총생산(GDP)의 10.5% 수준인 570억 달러(약 75조7000억 원)를 빌렸다.

당시 중도 우파 정부는 빚을 갚기 위해 세금을 올리고 복지 혜택을 줄이는 등 긴축 재정을 펼치겠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상의 무상 의료 등 현금 살포성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 정책에 길들여진 국민은 이를 거부했다. 현 좌파 정권 또한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엄청난 돈을 빌렸음에도 이것이 제대로 쓰이지 않으면서 치안 공백을 부추기고 있다. 아르헨티나 경찰의 평균 연봉은 400만 페소(약 1500만 원). 칠레(약 2700만 원), 멕시코(약 1900만 원)보다 적다. 역시 치안 문제를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손혜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객원교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일대는 평온해 보이지만 이곳을 조금만 벗어나도 무법천지”라며 “수도권 밖은 사실상 중앙정부 기능이 마비된 베네수엘라나 다름없다”고 전했다. 미국의 오랜 제재와 고질적 경제난으로 살인, 약탈, 방화 등 강력 범죄가 판을 치는 베네수엘라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 페소 급락 반기는 이웃 국민들
이런 상황을 반기는 이는 우루과이, 칠레 등 이웃 나라 사람들이다. 페소 가치 급락으로 자국 통화의 상대적 가치가 올라가자 원정 쇼핑을 넘어 아예 이사까지 오고 있다.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 엔트레리오스주와 맞닿은 우루과이 살토주 주민의 이사 행렬이 한창이다. 아르헨티나에서 ‘한 달 살기’ 등도 인기다.

살토의 자동차 정비사 카를로스 가릴시아 씨는 부에노스아이레스타임스에 “현재 임차료의 20%만 내도 엔트레리오스주 콩코르디아에 아파트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우루과이 페소를 미 달러로 바꾸고 이를 다시 아르헨티나 페소로 환산하면 자국에서 내는 돈의 5분의 1에 좋은 집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살토 주민 마이콜 호르바트 씨는 “다리 하나만 건너면 아르헨티나 땅이어서 이사를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집을 구하면 일은 여전히 우루과이에서 하고, 거주는 상대적으로 물가가 싼 아르헨티나에서 하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르헨티나 국민조차 자국 페소를 쓰지 않는다. 일부 화가는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된 페소를 이어붙여 캔버스 대용으로 활용한다. 1만 명의 직원을 둔 결제 서비스 제공업체 ‘메르카도 리브레’ 또한 직원 이탈을 막기 위해 급여의 일부를 달러로 지급한다. 월급을 페소로 주면 직원들이 달러로 주는 다른 직장을 찾아 떠나는 탓이다.

브라질, 칠레 축구팬은 아르헨티나 팀과의 경기 때 아르헨티나의 경제 상황을 조롱하기 위해 종종 아르헨 페소를 불태우거나 찢는다. 이에 아르헨 당국은 페소를 찢다 적발된 사람을 최대 30일의 징역에 처할 수 있는 법안까지 최근 마련했다.


박효목 기자 tree624@donga.com
김보라 기자 purple@donga.com


#아르헨티나#치안 불안#등굣길 피살#좌파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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