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국방장관 후보 떠오른 플러노이가 보는 ‘워라밸’이란?[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정미경 기자 입력 2020-11-24 14:00수정 2020-11-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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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 시내에는 국무부, 법무부, 재무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등 많은 정부 부처 본부들이 있습니다. 한 곳 예외가 있다면 워싱턴 근교 알링턴에 있는 국방부 본부, 펜타곤입니다. 너무 커서 워싱턴 시내에는 도저히 지을 수 없었다고 하죠. 펜타곤은 근무자가 2만7000~2만8000명에 달하는, 단일 건물로는 세계 최대 규모입니다. 물론 이건 본부 규모일 뿐이고, 현역 군인, 주방위군 등 실제 군인들 숫자까지 합치면 미 국방부는 280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세계 최대 고용주입니다.

그래서 국방부 수장을 뽑을 때는 작전 수행 능력과 더불어 조직 운영 능력을 중요하게 봅니다. 이 말은 두 가지 능력을 동시에 갖춘 사람을 찾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죠. 대부분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성 출신들이 출세 코스로 장관이 되지만 그 방대한 조직을 잘 이끌지 못해 고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혹 짐 매티스 전 국방부 장관처럼 두 가지 능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 나타나기도 해요. 하지만 매티스 전 장관은 가장 중요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코드’가 맞지 않아 거의 쫓겨나듯 물러났습니다.
조 바이든 차기 미국 행정부의 초대 국방장관으로 강력하게 거론되는 미셸 플러노이 전 국방차관(가운데). 장관이 된다면 미 역사상 첫 여성 국방장관이 탄생한다. 오른쪽은 남편인 W 스콧 굴드 전 보훈부 차관. 워싱턴이그잭트

그래서 조 바이든 초기 내각의 국방부 장관으로 여성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아무리 바이든 차기 행정부가 여성 중용 정책을 내걸었다고 해도 최대 조직에 전장에 나가 총 한번 쏘아본 경험이 없는 여자를 리더 자리에 앉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파격이죠.

강력한 후보로 떠오르는 인물은 미셸 플러노이 전 국방부 차관(59)입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정책담당 차관을 지냈습니다. 정책 차관을 ‘넘버3 포스트’라고 하는데요. 장관, 부장관에 이은 5명의 차관 중 가장 노른자위 직책으로, 미국이 수많은 세계 분쟁 중 어느 분쟁에 나서야 하고, 어떤 군 위주로 개입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의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하버드대 졸업-옥스퍼드대 유학이라는 고위관리 교육 정코스를 밟은 후 하버드대에서 연구하다가 빌 클린턴 행정부 때 처음 정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죠.

그녀가 차관 시절 수립했던, 그리고 이후 싱크탱크 연구에서도 계속 담당해온 전시작전 계획들은 실제로 “뛰어나다”는 평을 듣습니다. “사려 깊은” “실용적인” 등의 수식어가 붙죠.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같은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변하는 국가적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위기가 예상되는 지역에 기민한 선제 대응을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사이버 군사전, 인공지능(AI) 도입 등 군 수뇌부 인사들이 뒤쳐지는 ‘IT 리터러시(정보기술 해독력)’도 앞선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흔히 ‘펜타곤’으로 불리는 미 국방부 본부 건물. 워싱턴 시내에 있는 다른 정부 건물들과는 달리 포토맥강을 건너 국립묘지로 유명한 알링턴에 위치해 있다. 스미소니언 매거진

하지만 실제 경험이 없다보니 플러노이의 전쟁 리더십에 “이론적이다” “탁상공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것도 사실인데요. 이런 경험 부족을 메워주는 것이 바로 그녀의 조직 이해력입니다. 그녀가 장관이 될 수도 있다는 말에 국방부 직원들이 가장 기뻐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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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노이 조직 리더십의 강점은 ‘생활로서의 군’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군은 전쟁을 위해 존재한다고 할 만큼 전쟁수행 능력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국가간 대규모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기 힘든 21세기 정치외교 구도로 볼 때 생활인, 조직 구성원, 커리어 관리 차원에서 군인들을 통솔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입니다.

이게 바로 그녀가 스스럼없이 강조하는 ‘워라밸(가정-일 양립)’ 개념이기도 합니다. 물론 너무 흔해져버린 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조금 근사하게 들리는 ‘인재 유지(best talents retainment)’라는 말을 쓰더군요. 군이 그 특유의 권위주의적, 상명하복 조직 문화를 개선하지 않으면 최고의 인재들을 다른 분야로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거창한 정책 변화도 아닙니다. ‘워라밸’이라고 해서 여성에게만 이득이 되는 제도도 아니구요. 플러노이 차관 시절 국방부는 ‘예상시간 휴무제(PTO)’를 도입했습니다. 직장인이라면 일주일에, 또는 한달에 몇 차례 꼭 가정을 위해 시간을 내야 할 때가 있죠. 아이들 학교에 가기 위해, 부모님을 병원에 모시고 가기 위해 한나절이 필요합니다. 미리 예상 가능하지만 필요할 때마다 상사에게 주저리주저리 말하기 꺼려지는 시간이죠. 미국 직장들은 팀별로 일을 많이 진행하니 팀제도로 PTO를 도입할 경우 미리 신고만 하면 다른 팀원이 나를 위해 몇 시간 일을 커버해줍니다.
2009년 미셸 플러노이 국방차관 시절 미사일방어에 대한 하원 청문회에 출석했을 때 모습. 워싱턴포스트

플러노이 전 차관은 “이런 제안마저도 정시 출퇴근을 중시하는 국방부 문화에서 쉽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처음 국방부 내부 타운홀 미팅에서 이런 제안을 했더니 상사와 동료들이 쓴웃음을 지으며 ‘먹히지도 않을 소리’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죠.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도입된 후 국방부 직원들이 가장 잘 활용하는 제도도 정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 필요한 워라밸 제도는 그녀의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자녀 3명을 둔 엄마’라는 워싱턴 성공 교과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여성 직장인이다 보니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잘 아는 것이죠. 그래서 더 이상 시간 관리가 용이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때는 미련 없이 국방부 3인자의 자리를 포기했습니다. 임명 3년 뒤 아이들이 손이 많이 가는 10대 청소년기에 접어들자 남편과 상의 후 사표를 냈습니다. 그녀의 남편 역시 당시 보훈부 차관으로 이들 부부는 워싱턴의 잘 나가는 파워 커플이었죠. 그녀의 사표는 워싱턴 정가에서 큰 화제가 됐었죠.

12월부터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의 장관 발표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외교관계 차원에서 한국이 관심을 두는 미국 장관은 서너 명에 불과합니다. 국방장관은 국무장관과 더불어 톱급인데요. 플러노이가 예상대로 장관이 된다면 트럼프 대통령 시절 추락한 국방부의 자존심과 내부 결속력을 다시 올리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그녀만큼 모든 면에서 갖춘 후보를 찾기도 힘들지요.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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