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창 일행, 北대사관 습격 8개월전 스페인 입국해 사전답사”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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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수사문건 15페이지 전문 입수

에이드리언 홍 창 일행은 주스페인 북한대사관 습격을 8개월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한 것으로 확인됐다. 동아일보는 지난달 30일 스페인 수사판사가 적은 수사 문건 15페이지 전문을 확보했다. 이 문건에는 치밀한 사전 준비와 습격 당일의 긴박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치밀했던 사전 답사

홍 창을 제외한 미국 국적의 한국 출신 샘 류와 한국 국적 이우람 등 6명이 지난달 22일 주스페인 북한대사관 습격에 앞서 처음으로 마드리드 땅에 발을 디딘 건 8개월 전인 지난해 6월이었다. 이들은 지난해 6월 15일부터 열흘간 북한대사관에서 불과 200m 떨어진 한 호텔에 머물렀다. 지난달 30일 호텔의 높은 층 방의 창문에 서 보니 북한대사관 마당이 훤히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홍 창은 범행 보름 전인 2월 6일 스페인에 입국했다. 사전답사를 위해서였다. 다음 날 오후 4시경 홍 창은 처음으로 북한대사관을 방문했다. 그는 대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에서 소윤석 상무관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홍 창은 두바이와 토론토 주소의 캐피털 회사 명함을 건네며 “북한 투자에 흥미를 갖고 있다”고 말해 환심을 샀다. 명함 이름에는 1979년 1월생 ‘매슈 차오’로 적혀 있었다. 실제 홍 창은 1984년생이다. 그는 이날 총포상에서 습격에 사용할 무기들을 둘러본 뒤 다음 날인 2월 8일 스페인을 떠났다.

홍 창을 제외한 샘 류 등 일행들은 범행 9일 전인 2월 13일 스페인에 입국해 북한대사관 근처 호텔에 다시 묵었다. 2월 19일 하얀색 알람브라 밴 차량을 빌렸고, 다음 날부터 사흘 동안 매일 철물점에 가서 범행 도구를 조금씩 모았다. 리더 격인 홍 창은 2월 19일 체코 프라하를 거쳐 마드리드에 입국했다. 다음 날 멕시코 대사관에 가서 멕시코 여권을 갱신했다.

스페인 수사 당국이 문건에서 신원을 적시한 이는 모두 7명이다. 이 중 홍 창을 제외한 6명은 모두 1990∼1995년생으로 20대 중·후반의 청년들이었다. 멕시코 미국 국적인 홍 창, 미국 국적인 샘 류를 제외한 나머지 5명의 국적은 모두 한국이었다.

○ 2월 22일 긴박했던 하루

습격 당일인 22일 오전 10시 56분, 홍 창은 총포상에서 총 6자루, 칼 4자루, 수갑류 족쇄 5개 등을 구매했다. 현지에서 만난 총포상 직원은 “진짜 무기들은 전문 자격증 없이는 구매할 수 없다”며 “이들이 구매한 총은 놀이공원에서나 사용되는 총으로 인체에 위험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시각 샘 류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은 철물점에서 사다리와 펜치, 대형 망치, 입막음용 테이프 등을 샀다.

오후 5시, 홍 창은 북한대사관 문을 두드렸다. 다른 일행은 대사관 앞에 정차시킨 렌터카 안에서 대기했다. 홍 창이 “소 상무관을 보러 왔다”고 하자 북한대사관 직원 최모 씨가 문을 열었고, 일행은 일제히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당시 북한대사관 직원과 정원사 등 7명이 있었다.

수사 문건에 따르면 이들은 차례대로 직원들을 제압해 팔을 결박했고 일부는 머리에 봉지를 씌우기도 했다. 회의실, 화장실 등 곳곳에 가뒀다. 구매한 가짜 총으로 소 상무관 목덜미를 겨눴다.

그사이 정원사의 부인 조모 씨가 2층 방에 숨어 있다가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뒷문으로 탈출했다. 심각하게 다친 조 씨의 요청으로 한 주민이 신고했고 응급차와 경찰 3명이 출동했다. 조 씨는 응급차를 타고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고 경찰은 대사관 초인종을 눌렀다.

홍 창은 김정은 얼굴 배지가 달린 재킷을 입고 나타나 “나는 대사관 소속 직원인데 아무 문제가 없다”며 “만약에 대사관 직원 중 다친 사람이 있다면 경찰은 우리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고 수사 문건에 적혀 있다. 경찰은 이후 대사관 앞에서 계속 대기했다.

일행은 소 상무관을 지하실로 끌고 가 “우리는 북한 해방을 위한 인권운동 단체 멤버”라고 소개하고 “북한을 버리라”고 회유했다. 소 상무관은 “나는 조국을 배신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후 습격 일행은 컴퓨터와 폐쇄회로(CC)TV 화면이 담긴 하드디스크, 휴대전화 등을 챙겼다.

오후 9시 40분경, 일행은 대사관 차량 3대를 나눠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홍 창은 일행 한 명과 함께 대사관 뒷길을 통해 나선 뒤 들판 건너편에서 애플리케이션으로 택시를 불러 빠져나갔다. 그 전에 대사관 앞 로터리에 택시를 불렀지만 대기 중인 경찰을 의식해 취소한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수사 당국은 이들이 대사관을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북한대사관 직원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리스본을 거쳐 뉴욕에 간 홍 창은 27일 미 연방수사국(FBI)에 관련 자료를 넘겼다.

○ 떨어뜨린 위조 운전면허증이 결정적 단서

홍 창 일행이 떠난 지 불과 10분 뒤인 오후 9시 50분경, 북한 유학생 3명이 대사관을 방문했다. 이들은 벨을 눌러도 답이 없자 담벼락을 넘어 대사관 안으로 들어갔고 건물 안에 묶여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대사관 밖으로 나왔다. 대기하던 스페인 경찰들은 즉각 이들을 풀어줬다. 오후 10시 35분 소 상무관은 대사관 안에서 과학수사를 비롯해 모든 수사를 해도 좋다는 허가서를 발급해줬다. 습격자들이 타고 나간 대사관 차량 3대는 이날 오후 11시부터 다음 날 오전 4시 30분까지 차례대로 마드리드 시내에서 발견됐다.

홍 창의 정체가 드러난 건 그가 들판에 운전면허증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홍 창이 소 상무관에게 건넸던 명함에 적힌 ‘매슈 차오’ 이름으로 위조된 이탈리아 운전면허증에는 홍 창의 사진이 있었다. 스페인 경찰은 사진을 추적해 홍 창의 정체를 밝혀냈다.

홍 창은 범행 당시 3가지 이름을 사용했다. 매슈 차오 외에 마드리드에서 여러 차례 이용한 택시 애플리케이션에는 ‘오스왈도 트럼프’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호텔을 예약할 때는 본명을 그대로 사용했다. 홍 창은 미국에 도착한 뒤 호텔로 연락해 자신이 두고 간 짐을 지인이 가져갈 것이라고 연락했다. 이를 가져간 황모 씨가 현지 조력자로 보인다.

마드리드=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스페인#북한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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