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구자룡]두테르테, 한국에 숙제를 던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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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룡 베이징 특파원
구자룡 베이징 특파원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기 하루 전인 17일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은 국제정치 전문지인 포린어페어스에 ‘재균형과 아시아태평양 안보’라는 글을 실었다. 그는 4월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 때 숨진 미군 1만7000여 명이 묻힌 마닐라 미군 묘지에 헌화했다. 카터 장관은 전후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이들의 희생이 있었고, 이 평화와 안정을 바탕으로 아시아의 경제적 기적이 가능했다고 기고문에 썼다. 미국이 제공한 안보의 수혜자로 일본 한국 대만과 동남아 국가뿐만 아니라 중국과 인도도 거론했다. 안보는 산소와 같아서 있을 때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지만, 없으면 어떤 다른 것도 생각할 수 없다며 지난 70년간 미군이 아태 지역에 산소를 공급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미군과 연합훈련 중단 등을 언급했던 두테르테 대통령은 중국 방문 기간에도 “미국과 작별해야 할 시간” “미국과의 결별(separation)” 등의 발언을 쏟아내며 탈미(脫美) 행보를 가속했다.

 한 중국 전문가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20일자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미국이 남중국해에 개입하는 구실은 중국과 필리핀 간에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 때문이었다. 이제 그런 갈등이 없어졌으니 미국이 개입할 정당성이 의문시된다”고 주장했다.

  ‘결별’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를 놓고 파장이 일자 두테르테 대통령은 21일 필리핀에 돌아가자마자 “동맹 관계의 단절(severance)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왜? 미국과의 관계 유지가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앞으로 탈미친중 노선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두테르테 대통령의 행보는 아태 지역에서 필리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과의 관계를 약화시키는 중국의 경제적 유인을 ‘소프트파워’로 규정하고, 이것이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에도 파괴적인 신호를 보낼 수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베트남은 이달 2일 미국과의 종전 21년 만에 깜라인 만에 미군 군함의 기항을 허용했지만 22일부터 4일 동안 중국 군함 3척의 기항도 용인했다.

 심지어 2차 대전 후 아태 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강력한 군사동맹국인 호주도 최근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59%는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과는 어떤 군사훈련도 해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트럼프나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중 누가 대통령이 되건 호주의 중국 쏠림 현상은 계속될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두테르테의 최근 행보를 ‘외교모험주의’라고 비판하면서도 “필리핀이 중국과 시시덕거리는 데는 미국도 반성할 것이 있다”고 꼬집었다. 버락 오바마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은 그다지 열의가 보이지 않았고 필리핀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의 충성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중국이 두테르테 포용을 통해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미의 한반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에 공세적으로 나올 수도 있다. 중국은 19일 주중 한국대사관 국경절 리셉션에 과장급을 보내고, 고위 인사들의 불참 사실을 당일에야 통보하는 옹졸한 외교적 결례도 서슴지 않았다. 북핵을 막겠다는 방패인 사드를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을 저지하는 창으로 삼겠다는 태세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한국에 다시 한 번 “미중 사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구자룡 베이징 특파원 bonhong@donga.com
#두테르테#필리핀 대통령#파이낸셜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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