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승헌]미국인들의 음담패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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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음담패설 동영상이 7일 폭로된 후 미국 대선판을 집어삼키고 있다. 여성 성기를 뜻하는 ‘p****’가 들어간 그의 걸쭉한 막말에 여야 가리지 않고 삿대질이다. 급기야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이 파문을 빌미로 평소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하지만 메가톤급 파장에도 트럼프는 아직 버티고 있다. 심지어 14일 공개된 라스무센 여론조사에선 트럼프가 43%, 민주당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이 41%로 오히려 트럼프가 2%포인트 앞섰다.

 이 아이러니의 정체는 무엇일까. 미국인들의 이중적인 언어 습관과 영화 등 대중문화를 들여다보면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실제 미국인들은 욕이나 상스러운 표현을 종종 쓴다. 고급 영어를 쓰는 중산층 이상 백인들도 편한 자리에서는 트럼프 동영상에 나오는 ‘p****’, ‘f***(성관계)’, ‘b****(마녀)’ 등을 때때로 사용한다. 단어 본연의 뜻으로도 쓰고 친밀감을 나타내려고도 쓴다. 이 단어들은 다른 말을 강조하는 접두어, 접미어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우리말로는 ‘열라’ 정도다. 얼마 전 버지니아 주 해리슨버그의 트럼프 지지자 모임에 갔더니 한 지지자가 이런 문구를 들고 있었다.

  ‘Donald, Make America f***ing great again’(트럼프 선거 구호를 따서 “도널드, 미국을 다시 열라 위대하게 만들어줘” 정도의 표현).

 트럼프 동영상에서 가장 저질스러운 표현인 p****는 다양한 의미로 할리우드 영화에서 오래전부터 자주 등장해 왔다. 최근 파경한 ‘브랜젤리나’ 커플을 탄생시킨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에서 아내 앤젤리나 졸리는 남편 브래드 피트에게 ‘계집애’ 같은 겁쟁이라는 뜻으로 p****라고 소리친다. 13세 이상 관람가인 이 영화는 공교롭게 트럼프 음담패설이 촬영된 2005년 상영됐다.

 얼마 전 미국인 친구가 “40대 백인 가정의 현실을 알고 싶으면 보라”고 권해서 찾아 본 영화 ‘디스 이스 포티(This is Forty)’(2012년)에서 주인공 백인 부부는 고상한 척하면서 필요하면 상스러운 욕설을 퍼붓는다. 어느 날 남편은 딸이 학교에서 남학생에게 놀림을 당하자 남자아이 엄마를 찾아가 막말을 쏟아낸다.

 “내 딸은 천사고, 당신 아들은 빌어먹을 짐승 새끼야. 내가 당신 집에 가서 당신의 아이폰, 아이패드 다 부숴 버릴 거야.”

 충격을 받은 남학생 엄마는 학교 교장에게 신고했지만, 딸 아빠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다시 고상한 언어를 꺼내 이 엄마의 울화통을 치밀게 한다.

 이쯤 되면 트럼프가 자신의 음담패설에 대해 “탈의실 대화였다”며 얄밉게 빠져나가려 했던 배경이, 짜증나지만 수긍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고상한 당신들도 평소 하는 말을 갖고 왜 나한테만 난리냐”는 항변이다. 트럼프가 완전히 추락하지 않는 것도 평소 이런 말(?)을 다양한 뜻으로 사용하는 일부 지지자들이 “트럼프만 그런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성추행을 시도(또는 상상)했던 트럼프가 잘한 건 없다. 파문 이후 대응도 대통령 자질을 의심케 한다. 그렇다고 음담패설 파문이 공화당, 특히 트럼프 지지자들을 뒤흔들어 선거가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미국인들의 속살을 잘 모르는 것이다.

 메이저리그 야구팀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선수인 요기 베라의 명언이 지금 상황에 딱 들어맞는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공교롭게 트럼프, 클린턴 모두 뉴욕이 정치적 고향이다.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ddr@donga.com
#미국대선#도널드 트럼프#성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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