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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승헌]한미동맹의 미래는 PGA투어인가 LIV 골프인가요즘 세계 스포츠계의 핫이슈는 PGA투어와 LIV 골프 간의 갈등이다. 세계 남자 골프의 패권을 지키려는 106년 전통의 미국프로골프(PGA)에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의 후원을 받는 신생 투어가 정면 도전에 나섰다. 처음에는 LIV 골프가 망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하지만 전 세계 랭킹 1위 더스틴 존슨 등이 잇따라 PGA를 탈퇴하고 LIV에 합류하면서 예측은 빗나갔다. PGA를 수호하기보다는 오일 머니의 수혜를 누리겠다는 선수가 의외로 많았던 것. LIV를 돈 잔치라고 비난해 온 PGA 간판스타 로리 매킬로이가 “내 예상이 틀렸다”고 할 정도다. 필자는 PGA와 LIV의 충돌과 예상치 못한 상황 전개를 보면서 국제 정치 질서, 특히 한미동맹의 향후 모습이 자주 오버랩된다. PGA가 전통과 스포츠맨십을 중시하는 일종의 가치 동맹이라면 LIV는 돈이 최고 기준인 이익 동맹. 과연 미래의 한미동맹은 둘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하는 것이다. 한 달 전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첫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거론하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다. 기존 안보 동맹에서 가치 동맹, 더 나아가 반도체와 공급망 이슈를 함께 고민하는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으로 격상시키자고 합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상회담 한 번 했다고 갑자기 최상위 수준의 동맹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회담 결과를 집행하기 위한 액션 플랜을 짜는 건 지금부터다. 한미 정상회담 후 본격화되고 있는 전 세계적 경기 침체까지 겹치면서, 중국이라는 리스크 관리에 글로벌 동맹 격상에 따른 미국의 청구서를 의식해야 한다는 우려도 엄존하고 있다. 특히 요새 한미 외교가에선 바이든의 정치적 입지에 따라 한미동맹의 미래가 출렁일 수 있다는 말이 확산되고 있다. 한미 정상의 임기 사이클이 서로 다른 데 따른 것이다. 윤 대통령이야 임기 시작한 지 한 달여 지났지만 취임한 지 1년 반 넘은 팔순의 바이든은 올해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다. 결과에 따라 2024년 재선 가도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바이든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신저가를 경신 중일 정도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17일 여론조사기관 유고브와 야후뉴스의 차기 대선 조사에서 바이든은 42%,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44%를 얻었다. 바이든이 18일 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게 그의 정치적·신체적 상태와 얽혀 조롱 섞인 화제가 되는 건 이런 흐름과 결코 무관치 않다. 윤 대통령의 핵심 외교 참모는 최근 필자에게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바이든이 중간선거에서 패하면 미국은 급속히 차기 대선 모드로 전환된다. 트럼프 또는 그 추종 세력이 집권이라도 하면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을 포함해 안보의 틀을 새로 짤 수도 있다. 진짜 안보 위기가 올 수 있다.” 마크 에스퍼 전 미 국방장관이 회고록 ‘성스러운 맹세’에서 폭로한 트럼프의 “주한미군 철수하겠다”류의 발언을 다시 들을 수 있다는 것. 피로 엮인 한미동맹을 LIV 골프보다 더 저열하게 돈의 잣대로 뒤흔드는 악몽이 재연될 수 있다는 얘기다. 요새 대통령실과 국민의힘 주변에선 “대통령 바뀐 뒤로 한국에 대한 워싱턴의 인식이 달라졌다”는 자화자찬이 자주 들린다. 정작 백악관은 소용돌이 한복판으로 향하고 있다. 한미동맹의 업그레이드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11월 미 중간선거 이후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외교 문제만큼은 섣부른 정신 승리를 멀리해야 한다.이승헌 부국장 ddr@donga.com}2022-06-22 03:00
[오늘과 내일/이승헌]용산 1층은 노량진 수산시장 같아야 한다윤석열 대통령이 용산 청사 1층 로비에서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 워싱턴 정가에서 ‘도어 스테핑(door stepping·취재진과 즉석에서 문답을 나누는 것)’으로 불리는 그것이다. 처음 할 때는 집들이 인사 정도로 생각했는데 내각 인선부터 공직자 검증 시스템, 추경까지 국정 전반으로 문답 대상이 확대되고 있다. 한국 정치에서 처음 벌어지는 풍경이라 의미가 작지 않다. 3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우선 국민들이 대통령을 잠시나마 날것 그대로 볼 수 있다. 이전 정부에서는 대통령들을 행사장이나 회의 인사말에서 주로 봤다. 대개 사전에 짜여진 것으로, 음악으로 치면 라이브가 아니라 녹음 버전에 가깝다. 회의 인사말은 홍보수석이나 대변인이 뉘앙스 등을 ‘마사지’하고 영상으로 내보낼 수도 있는 것들이다. 대통령이 어떤 이슈에 꽂혀 있는지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직속 인사검증관리단을 둘러싼 논란을 묻자 윤 대통령은 주먹을 위아래로 흔들며 답변을 쏟아냈다. 대통령 의중이 강하게 실린 조치라는 걸 대변인 브리핑 백 마디보다 이 한 장면으로 쉽게 알 수 있다. 대통령의 국정 수행 능력과 직결되는 물리적, 정신적 건강 상태를 짐작할 수도 있다. 이전 정권에서 치매설 등 대통령 정신 상태를 놓고 다양한 억측이 나온 것은 수개월이나 연 단위로 언론에 나타난 것과도 무관치 않다. 물론 윤석열표 도어 스테핑은 정착 여부를 논의하기도 이른 걸음마 수준이다. 질문은 한두 개를 넘지 않고, 질의응답은 대통령과 기자 간 티키타카식 토론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필자는 한국 대통령의 첫 도어 스테핑이 정착하려면 대통령이나 기자들 모두 선을 넘어서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기자들에겐 “그래도 누구 앞인데…” 하는 심리적인 검열 같은 게 있을 수 있다. 대통령도 “뭐 이런 걸 다 묻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문답은 차갑게 식어버릴 수 있다. 윤 대통령이 요새 미 정가를 자주 언급하는데, 특파원 시절 지켜본 워싱턴에선 정말 별의별 질문과 문제 제기가 대통령을 향해 쏟아졌다. 대통령과 기자가 만나는 곳은 늘 시장이나 카페처럼 시끌벅적했다. 버락 오바마는 2014년 8월 이슬람국가(IS) 등을 겨냥한 대테러 대책을 발표하는 자리에 베이지색 정장을 입고 나왔다. 언론은 안보를 언급하는 자리에 부적절한 옷 색깔이라고 비판했다. 물건 팔러 나왔느냐는 비아냥거림도 있었다. 백악관 대변인은 반박 성명까지 냈다. 그런 오바마는 퇴임 회견에서 언론에 “대통령에겐 아첨꾼이 아니라 회의론자(skeptics)여야 한다. 나에게 거친 질문을 던져야지 사정 봐주고 칭찬하면 안 된다”고 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임기 첫해 정식 회견 외에 도어 스테핑만 216회 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했을까. 오바마의 퇴임 회견을 빌리면 “언론이 집요하게 진실을 끄집어내 나라를 최고의 상태로 만들어 달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윤 대통령이 여론을 날것 그대로 알고, 정권이 속에서 썩어들어 갈 가능성을 막는 정치적 백신을 원한다면 용산 청사 1층 로비는 지금보다 더 뜨겁고 거칠어져야 한다. 인근의 노량진 수산시장처럼 펄떡이고 살아있어야 한다. 기자들은 좌고우면하지 말고 돌직구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치권에 오랜만에 도입된 좋은 시도다. 훗날 누가 차기 정권을 잡든 되돌리기 어려운 정치 문화로 정착되기를 기대한다. 이승헌 부국장 ddr@donga.com}2022-06-01 03:00
[오늘과 내일/이승헌]尹, 1주일 뒤 한미정상회담부터 올인하라취임사로 미루어볼 때 윤석열 대통령 주변에선 6·1지방선거, 검수완박, 내각 인선 파행 등을 주로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이 사안들은 윤 대통령이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오히려 다음 주 토요일 열리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윤 대통령에겐 발등의 불이다. 통상 한국 대통령은 취임 후 한미동맹 차원에서 외교 행사 중 한미정상회담을 가장 먼저 해왔지만 이번 회담은 취임 직후 열린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취임 후 54일 만에,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 후 51일 만에 미국 정상과 만났다. 이것도 빠른 편이었으니 이번 한미정상회담 시기를 놓고 준비가 충분하겠느냐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더군다나 윤 대통령은 별다른 외교 경험이 없다. 그만큼 이번 한미정상회담은 그에게 기회인 동시에 리스크적인 요소가 있다. 크게 3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 이번 정상회담은 윤 대통령의 글로벌 데뷔 무대다. 바이든이 일본에서 열리는 쿼드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길에 잠시 갖는 상견례 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한미동맹 특성상 복도에서 잠시 만나는 ‘풀 어사이드 미팅’도 사실상의 회담으로 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지난해부터 워싱턴에선 미중 반도체 전쟁, 공급망 이슈, 인도태평양 전략 참여 등을 놓고 새 정부의 스탠스를 주시해왔다. 윤 대통령이 회담에서 내놓을 한마디 한마디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국무부 동아태차관보의 분석팀에 보내질 것이다. 윤 대통령이 북핵 정책이나 전시작전권 전환 시기 등을 놓고 한미 관계가 삐걱거린 것을 바로잡겠다면 워싱턴의 관심이 집중된 이번 회담만 한 기회도 없다. 둘째, 윤석열이라는 정치인 개인이 동맹국 정상에게 드러나는 자리다. 외교부와 국가안보실이 실무적인 준비는 하겠지만 외교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정상 간의 케미스트리가 의외의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허물없이 주변 사람들과 호형호제하는 윤 대통령과 농담 좋아하고 사교적인 바이든 간에 통하는 대목이 있을 수 있다. “당신과 친해지고 싶다”는 윤석열만의 메시지가 어떻게 발신될지가 관건이다. 이와 관련해 외교가에선 MB의 첫 한미정상회담을 자주 거론한다. 2008년 4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의 첫 회담에 선물로 전통 공예품을 들고 가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MB는 부시 부부가 아꼈던 반려견을 위한 선물을 전용기에 실어갔다. 그게 계기가 됐는지 부시와 MB는 퇴임 후에도 종종 만났다. 정상외교에 걸맞은 긴장감 있는 애티튜드도 중요하다. 윤 대통령이 종종 했던 ‘쩍벌’이나 취임식장에서도 보여줬던 다소 헐렁한 넥타이 매듭은 피하는 게 좋겠다는 말들이 외교가에선 적지 않다. 셋째, 대통령 집무실과 연회 공간이 바뀐 후 갖는 첫 번째 정상회담이다. 백악관이 해외 순방 때 자주 쓰는 표현 중 하나가 ‘로지스틱스(logistics)’, 즉 세부적인 일정 계획이다. 미국도 그동안 청와대를 기반으로 방한 일정을 짜온 만큼 처음 호흡을 맞추는 과정에서 자칫 의전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우리도 그렇지만 백악관은 해외 순방 중 경호상 티끌만 한 리스크나 오류가 발생해도 종종 계획 자체를 틀어버린다. 취임 후 첫 한미정상회담은 정부의 외교 역량과 대통령의 개인기가 더해져 새 집권세력의 실력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이벤트 중 하나다. 윤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이 관문을 어떻게 넘을지 국내외 많은 눈들이 지켜보고 있다. 이승헌 부국장 ddr@donga.com}2022-05-13 03:00
尹의 40일, 점차 드리우는 0選의 그림자[오늘과 내일/이승헌]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대선 전까지 ‘선출직 0선’이라는 사실은 플러스와 마이너스, 음과 양이 모두 있다. 우선 플러스 요인. 여의도에 빚진 게 없기 때문에 기존과는 다른 정치를, 더 정확히는 과감한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주변의 우려에도 경선 과정에서 김종인과 결별하고 막판에 안철수와 별다른 협상도 없이 전격적인 단일화를 이뤄낸 게 그러하다. 하지만 당선 이후 40여 일 동안 용산 집무실 이전 결정과 인선 논란을 보면서 이제는 0선의 그림자도 드리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기존 정치적 문법과 무관하게 당선되어서인지 여의도가 관행적으로 중시해 온 안배, 고려, 여론 살피기 등을 그다지 감안하지 않는다. 그 대신 효율, 빠르고 가시적인 성과, 자신과의 호흡이 핵심 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 당선인은 지난해 12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도중 이런 말을 했다. “국정운영이라는 게 대단한 뭐가 있다기보다는 상식을 갖고 전문가, 관료 중 능력 있고 검증된 사람을 잘 뽑아 쓰면 시스템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원론적인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최근 인선 등을 보면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물론 효율이나 성과는 중요하다. 공정, 상식 못지않게 문재인 정부에서 간과된 가치들이다. 문제는 여기에 집중하려다 보니 기존의 정치 문법에서도 물려받아야 할 것들이 동시에 휩쓸려 가고 있다는 데 있다. 그중 핵심은 최고 지도자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정치인지 감수성이다. 당선인은 선거 과정에서 자신이 정치 초짜라는 사실을 드러내왔다. 오히려 자신의 브랜드로 삼았다. “내가 정치언어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바꿔 말하면 기존 정치적 화법, 상황 인식을 몰라도 첫 번째 선출직 도전에서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자기 스타일의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당선인이 간과하고 있는 정치인지 감수성의 요체는 뭘까. 내가 사실이라 믿는 것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라고 필자는 본다. 윤 당선인이 능력을 보고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지명했다 생각하더라도, 사람들은 적폐청산 수사를 위해 최측근 인사를 발탁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당선인은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에 대해 “부정의 팩트가 확실히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범법 사실 이전에 새 정부 조각에서 조국의 그림자를 발견한 것 자체를 불쾌하게 여긴다. 이런 괴리가 길어지면 민심과 역주행하게 되고, 사람들은 당선인이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국정은 기업도 검찰도 법정도 아니다. 효율, 성과, 법리적 팩트만으로는 온전히 꾸려가기 어렵다. 정치인지 감수성을 바탕으로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고차 방정식이다. 수십 년간 쌓인 정치 혐오가 0선의 윤 당선인을 불러냈으나, 그에게 여전히 고도의 정치력을 요구하는 게 한국 정치의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윤 당선인이 기자들과의 만남을 피하지 않고 거의 혼밥을 하지 않을 정도로 소통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대목이다. 하지만 이런 것도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어야지, 만남 자체가 목적이거나 보여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만나고 밥 먹는다고 통치를 위한 정치인지 감수성이 저절로 키워지는 건 아니다. 당선인이 세상과의 진짜 소통을 통해 0선의 그림자를 서서히 거둬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이승헌 부국장 ddr@donga.com}2022-04-20 03:00
[오늘과 내일/이승헌]尹, 김정은의 도보다리 대화부터 인수하라우리는 난생처음 보는 대선에 이어 그에 못지않은 권력 인수인계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당선인이 서로 공개 설전까지 벌이다 28일 가까스로 만났지만, 인수인계 과정이 마냥 순탄하리라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나마 당선인 측에서 전향적인 목소리가 나오는 건 늦었지만 다행스럽다. 윤 당선인이 이날 회동에서 “잘된 정책은 계승하고 미진한 정책은 개선하겠다”고 했고, 김은혜 대변인은 “‘Anything But 누구’(누구 제외하곤 다)라고 가르기는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에서 선별적으로라도 인수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하나를 꼽으라면 정부가 5년간 파악하고 축적한 북핵 관련 정보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김정은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을 재개하며 북핵 시계를 2017년으로 되돌렸는데 문재인 정부에서 인수할 게 뭐가 있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북 정책이 실패로 끝난 것과 북한 관련 정보를 5년간 축적해 온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문재인 정부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만 세 번, 2019년 판문점 남북미 회동까지 합하면 네 번이다. 북-미 정상회담은 두 번 열렸다. 북한 최고 지도자와의 접촉 빈도는 역대 정부 중 단연 가장 많았다. 김정은에게 속았다고 해서 그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얻은 생생한 대북 첩보와 정보 자산까지 정치적으로 오염됐다며 쓰레기 취급할 건 아니다. 현재 결과는 어디까지나 정보를 잘못 해석하고 이용한 문 대통령의 책임인 것이다. 세계 최고의 정찰 자산을 가진 미국이 왜 지난 5년간 문재인 정부에 대북 정보를 요구했겠나. 우리만이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정보당국 관계자의 전언. “미국은 수시로 북한이 요즘 무슨 생각 하느냐고 우리에게 묻는다. 미국이 더 잘 알지 않느냐고 하면 ‘세밀한 뉘앙스 차이, 행간에 담긴 콘텍스트를 한국만큼 알 수는 없다’고들 했다.” 지금 인수위원 중 북핵 관련 핵심 인사는 외교안보분과의 김성한 전 외교부 2차관과 김태효 전 대통령대외전략기획관이다. 이명박 정부 인사들이다. 현업에서 마지막으로 북핵 정보를 접한 게 9년 전인 2013년이다. 그 이후로 접한 정보는 워싱턴 싱크탱크 수준 정도였을 것이다. 그만큼 윤 당선인의 북핵 정보는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북핵 정책을 유턴하기 위해서라도 지난 5년간 모은 대북 정보에 대한 빠짐없는 리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순순히 북핵 정보를 인계할지는 알 수 없다. 문 정권의 시그니처 정책이었던 데다 향후 적폐청산 수사 가능성 등을 의식해 정보 자산을 대통령기록관에 봉인할 수도 있다. 윤 당선인이 취임 후 ‘깡통 파일’만 보지 말란 법도 없다. 결국 당선인이 나서야 한다. 문 대통령이 진정 한반도 비핵화를 원한다면 북핵 정보 자산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한다고 설득하고 조율해야 한다. 현재 북핵 정보의 윤곽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문 대통령을 제외하곤 5년 내내 이 문제를 주도했던 서훈 국가안보실장이 거의 유일하다. 마침 얼마 전 당선인에게 북한 ICBM 도발 관련 브리핑도 한 데다 평생 정보맨으로 살아 온 사람이라 이 문제를 풀 적임자다. 우리가 머리에 이고 있는 북핵 문제만큼은 신구 권력이 대승적으로 서로 협력하라는 게 대선 승패를 가른 ‘0.73%’포인트의 또 다른 시대적 주문일 것이다.이승헌 부국장 ddr@donga.com}2022-03-30 03:00
[오늘과 내일/이승헌]파티는 오늘 밤 끝내라이게 무슨 김새는 소리인가 할 수도 있겠다. 격전 끝에 대선 승리를 거머쥐었는데 파티를 벌써 끝내라니. 아직 수저도 뜨지 않은 잔칫상과 선물 꾸러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텐데 말이다. 이 때문에 ‘선거가 끝났으니 민생에 집중하라’ 정도의 레토릭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를 오래 지켜본 사람들이 이맘때 하는 말이 있다. 당선되는 날이 하이라이트이자 정점이고, 그날 후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고난이 도사리고 있는 내리막길이라고. 실제로 역대 대통령 당선인과 그 주변 세력들은 선거 후 실존적 고민을 주변에 토로하곤 했다. 이제 내 세상인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주변 사방 천지에 널려 있었던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2008년 취임 후 글로벌 금융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했다는 데 큰 이견은 없다. 그런 이 전 대통령은 당선 후 참모들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놨다고 한다. “내가 경제 대통령을 내걸고 당선되어서 사람들은 샴페인 터뜨릴 일만 있을 줄 알았을 텐데 막상 되고 보니 금융위기 때문에 나라가 거덜 나게 생겼더라. 그런 상황을 인수받았다.” 지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 유가가 치솟고 서방과 경제 제재를 주고받는 극도로 불안정한 경제 환경에서 새 당선인의 사정이 별반 다를 건 없을 것이다. 청와대가 직간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최대 7000여 자리에 대한 인사권은 가장 큰 전리품, 대선 파티의 메인 메뉴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막 휘두르면 어느 순간 스스로를 베는 양날의 칼이자,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고 다루면 알이 터져 전체로 독이 번지는 복어 같은 것이다. 승리에 취해 마구 주무르면 정권 전체를 망쳐버리는 치명적인 유혹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극적 파국은 최순실 때문이었지만 전조는 인수위 시절 잇따른 인사 헛발질이었다. 보안을 이유로 자기네들끼리 짬짜미한 황당한 인사 내용을 봉투에 밀봉했다가 공개하곤 했던 박 전 대통령은 결국 첫 국무총리 인사부터 어그러졌다. 선거 기간 역할에 걸맞은 자리를 달라며 들끓을 ‘파리 떼’들은 파티장이 아니라 정글에 막 들어섰음을 알려줄 것이다. 이명박 정부 탄생의 일등 공신이지만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뒤 정치의 덧없음을 몸소 보여줬던 고 정두언 전 의원은 2008년 2월 25일 새 정부가 출범하는 날 주변에 이런 이메일을 보냈다. “대선 뒤처리 중 제일 크고 힘든 일이 고생한 사람들에 대한 (인사 등) 처우 문제다. 한마디로 말하면 고통 그 자체다. 오죽하면 낙선한 측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까. (중략)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정부 인선은 참으로 아슬아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은 권력이 오만하다 느껴지면 바로 등을 돌려 버린다.”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 탄생할 대통령 당선인은 누가 되더라도 며칠간은 몸을 낮추며 정치개혁이나 통합정부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면서 치열한 선거전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라도 승리의 파티를 즐길 준비를 은밀히 할지 모르겠다. 본인이 아니면 주변 측근들이 부추길 수도 있다. 하지만 국내외 여건을 봤을 때 한 가지 분명한 건, 당선 직후부터 절제하지 않고 승리에 도취하면 임기 5년이 힘들어질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는 것이다. 네거티브만 남은 최악의 대선을 거친 만큼 이제라도 진짜 일과 헌신의 시간을 준비해야 한다. 성공한 대통령을 바란다면 승리의 의식은 오늘 밤으로 짧고 굵게 끝내야 한다. 이승헌 부국장 ddr@donga.com}2022-03-09 03:00
문 대통령이 썼으면 하는 마지막 편지[오늘과 내일/이승헌]“대통령은 독특한 자리다. 성공을 위한 청사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조언이 딱히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내 임기를 되돌아본 결과를 전하려 한다.” 2017년 1월 20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백악관을 떠나며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 한 통을 집무실 책상 서랍에 넣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부터 시작된 전통으로 수신자는 그렇게 비난했던 후임 도널드 트럼프였다. 4가지 조언을 했는데 필자는 이 대목이 가장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이 자리에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이다(temporary occupants of this office). 이 때문에 법의 원칙과 같은 민주적 제도와 전통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 영구 집권하는 게 아니니까 너무 멋대로 하지 말고 지킬 것은 지키라는 것이다. 뻔한 말처럼 들리지만 대통령을 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책이나 보고서를 통해서는 알기 어려운 인사이트가 있다. 앞서 조지 H 부시(아버지 부시)는 1993년 1월 당시만 해도 까마득한 애송이였던 빌 클린턴에게 백악관을 넘겨주며 이렇게 편지를 썼다. “… 매우 힘든 시간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공정하지 않다고 여길지도 모를 비판 때문에 더욱 힘들 것이다. (중략) 그렇다고 비판자들 때문에 낙담하거나 경로에서 이탈하지 말라. 이제 당신의 성공이 곧 우리 이 나라의 성공이다….” 대통령의 ‘멘털’이 국정 운영에 중대한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역시 ‘선배 대통령’이 해줄 수 있는 조언이었다. 남편 빌을 도와 부시를 상대로 격전을 치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오늘(15일)부터 대선전이 본격 시작되면서 그만큼 문재인 대통령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게 됐다. 다음 달 9일 이후엔 세상의 시선이 온통 당선인에게 쏠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대통령 퇴임 과정을 지켜봤던 만큼, 나름의 정리 시간을 가질 것이다. 그중 하나로 앞서 소개한 것처럼 후임자에게 편지를 남기는 게 어떨까 싶다. 어떤 사람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권교체 여론이 50%를 넘나드는데 문 대통령에게 무슨 국정 운영의 인사이트를 기대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통령 경험자만이 전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이는 정파와 무관한 것이다. 성공담이든 실패담이든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얻은 교훈은 문 대통령이 양산 사저에 싸들고 갈 게 아니라, 차기 대통령이 국정 운영에 참고할 국민적 정치 자산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금 거론되는 유력 후보들은 정치 경험이 일천하거나 짧고 중앙 행정 경험이 없다. 코로나19 대응, 북핵 및 미중 정책, 한일 관계 정상화 등 문재인 정부에서 못 푼 복잡다기한 이슈는 고스란히 차기 정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지 후보와 무관하게 차기 정부에 대한 국민적 불안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코로나 사태 초기 백신 수급에 실패한 배경이나 김정은에 대한 술회를 허심탄회하게 전한다면 누가 당선되든 유용한 것이다. 청와대 고위급 인사는 얼마 전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참모들은 조언을 하는 것이고 결국 최종 결정은 대통령 몫이다. 대통령만이 알고 느끼는 시간이란 게 따로 있다.” 문 대통령은 임기 내내 소통이 부족했다. 마지막 신년 회견도 취소했다. 이 칼럼을 쓰면서 괜한 부질없는 짓 아닌가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문 대통령이 전임자들과 달리 마지막 편지를 쓴다면 세간의 평가가 조금이나마 달라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이승헌 부국장 ddr@donga.com}2022-02-15 03:00
[오늘과 내일/이승헌]윤석열, 트럼프에 졌던 힐러리를 기억하라“그래도 우리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인데 어떻게 이재명 같은 사람이 되겠나….” 얼마 전 만난 보수 성향의 전직 장관급 인사는 대선 판세를 거론하며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 윤석열의 열성 지지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보수 인사들 사이에서 자주 감지된다. 한 중견 정치학자는 “대한민국 역사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고 했고, 국민의힘 재선 의원은 “결국 이기지 않겠느냐”며 국운(國運)을 종종 거론한다. 이쯤 되면 ‘이재명 불가론’이다. 근저에는 거부감, 멸시 같은 게 있다. 이 같은 정서는 7년 전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캠페인에서도 비슷하게 감지된 적이 있었다. 워싱턴에 ‘족보’도 없는 트럼프가 출마를 선언한 2015년 6월 16일 오전, CNN 앵커와 패널들의 웃음소리가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백악관에 가겠다고 하네요. 호텔이 아니라 무슨 성(멕시코와의 국경 장벽)을 짓는다는데, 하하.” 필자는 ‘어떻게 너 같은 인간이 대통령에 도전하느냐’로 들렸다. 당시 오바마 시대의 주축인 엘리트 기득권층의 ‘트럼프 불가론’이었다. 공교롭게 둘 모두 막말 논란을 겪은 것도 비슷하다. 트럼프는 선거 막판 ‘음담패설 동영상’ 파문을 겪었다. 한 방송에서 여성 성기를 뜻하는 P가 들어간 막말을 한 게 뒤늦게 공개됐다. 다들 ‘저급한 트럼프의 실체가 드러났다’며 판세가 상대인 힐러리 클린턴으로 기울어졌다고들 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남자들이 탈의실에서 하는 농담 아니냐”며 버텼다. 이재명은 윤석열 부인 김건희 씨의 녹취록 방송 이후 ‘형수 욕설’이 재소환되고 있다. 윤석열 측이 욕설 파일을 공개하자 논란은 다시 일고 있다. 이재명은 눈물까지 보이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그렇다고 잘잘못을 떠나 선거 구도로만 봤을 때 이재명 욕설이 지지율 추이에 결정적 변수가 될지 현재로선 알기 어렵다. 이재명과 트럼프의 상황을 수평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비슷한 상대 후보와 그 주변을 둔 점은 공통점인 듯하다. 왜 자기가 집권해야 하는지 절박하게 설득하기보단 상대 후보 불가론에 더 의지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윤석열이 극적으로 이준석과의 내분을 봉합했지만 그 후 왜 윤석열이어야 하는지 명쾌하면서도 절절하게 호소하고 있는가. 윤석열과 국민의힘은 이런저런 공약을 발표하고 있지만 ‘이재명 되면 나라 망한다’를 넘어서는 담론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거론되는 게 윤석열로 일단 정권교체부터 하자는 ‘도구설’인데, 정권 교체 이후 그림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니 윤석열 지지율이 정권교체 지지율보다 낮은 여론조사가 적잖다. 힐러리도 비슷한 오류에 빠졌다. 트럼프를 상대로 내놓은 캠페인 구호가 ‘Change maker’(변화 주도자)였다. 트럼프의 ‘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 비해 하도 어정쩡해서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트럼프를 천박하다고 비난하다 정작 자기 선거 전략을 절박함 없이 대충 만든 것이다. 사실 이재명의 국정 비전도 도긴개긴이다. 하지만 정책 뒤집기든 말 바꾸기든 무엇을 해서라도 자신을 알리고 지지율 정체를 타개하겠다는 몸부림은 윤석열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윤석열 지지율이 다시 오르자 “실점만 하지 말자”며 ‘침대 축구’ 전략이 주변에서 거론된다고 한다. 대선까지 43일. 여론은 몇 번이고 더 출렁일 것이다. 이승헌 부국장 ddr@donga.com}2022-01-25 03:00
[오늘과 내일/이승헌]윤석열이 고전하는 숨겨진 진짜 이유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새해부터 위기에 빠지자 사람들이 그 이유를 찾느라 부산하다. 상당수는 부인 김건희 씨 논란과 함께 선대위를 망가뜨린 이준석 당 대표와의 내전(內戰)을 꼽는다. 아들뻘 하나 품지 못하는 정치력에 혀를 찬다. 하지만 이준석에 대한 피로감도 커지고 있다. 결국 이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쌍방 과실’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정치권을 오래 지켜본 사람들은 다른 이슈에 잠시 가려졌지만 윤석열의 입이 문제의 본질이라고들 한다. 전두환 발언 때만 해도 단순 실수인 줄 알았는데 ‘부득이 국민의힘 선택했다’ ‘청년 대부분이 중국을 싫어한다’에 이어 ‘미친 사람들 아니냐’까지 나오자 찍기 고민스럽다는 반응이 많다. 그가 정치 자산으로 내세우는 공정과 상식은 스스로의 성취라기보단 문재인+조국+추미애라는 ‘내로남불 연합’에 대한 반사효과로 얻은 것이다. 말실수 몇 방이면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더욱이 대선 본선은 그야말로 말의 전쟁. 결국 김종인이 “후보의 메시지, 연설문을 직접 관리하겠다”고 하기에 이르렀다. 윤석열은 왜 계속 말실수를 하는 것일까. 주변에선 ‘정치 초짜’의 경착륙 과정이라 여기는 듯하다. 한 측근 인사는 “새해 첫날 큰절한 것 보라. 학습 능력이 좋아서 말도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전망은 한국 보수세력 특유의 대책 없는 낙관론이라고 필자는 본다. 유권자의 마음을 사는 ‘정치 언어’가 무슨 대치동 학원에서 속성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윤석열의 화법, 언어에 대한 인식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윤석열은 다변가(多辯家)다. “종종 삼천포로 빠지니 주의하라.” 지난해 말 윤석열을 인터뷰하기 전 그를 잘 아는 지인이 필자에게 해준 말이다. 실제로 만나 보니 삼천포를 지나 남해 바다 한가운데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다. 컨디션이 좋으면 몇 시간이고 대화를 주도하는 스타일이다. 이런 화법을 시중에선 ‘구라’라고 하는데, 이게 사적 대화에선 좌중을 휘어잡을 수 있지만 정치 언어로선 어디로 튈지 몰라 스스로 지뢰를 품는 격이다. 더 큰 문제는 정치 언어에 대한 인식이다. “정치 세계는 공직 세계나 학문 세계와 달라 상대에게 빌미를 주면 늘 왜곡되고 공격당할 수 있다.” 윤석열이 지난해 12월 28일 한국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실언 논란에 대해 한 말이다. 나는 A라고 말했는데 왜 민주당과 일부 언론에선 B라고 비판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에선 내가 사실이라 믿는 것보다 밖에서 어떻게 인식되는지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정치 IQ’가 뛰어난 정치인은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파악하고 필요하면 실제와의 차이를 줄이려 한다. 이런 인식이 부족하다 보니 윤석열의 사과 타이밍이 늘 한두 박자 늦었던 것이다. 이는 이회창 황교안 전 국무총리 등 실패로 끝난 법조인 출신 대선 주자들이 매우 취약했던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언어 문제에 있어서 윤석열 후보는 여전히 검사 티를 못 벗고 있다. 검사 시절에야 피의자들이 절대 갑(甲)인 윤석열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겠지만 유권자들은 그럴 이유가 없다. 무한대의 정보가 오가는 요즘은 한두 마디 상징적 언어로 정치인의 전체를 기억하는 경향이 어느 때보다 강하다. 윤석열이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검사 시절 한 문장으로 회자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정치의 팔 할은 결국 커뮤니케이션이다. 하물며 대선에 도전하는 후보가 말에서 어그러진다면 선거 기간 내내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이승헌 부국장 ddr@donga.com}2022-01-04 03:00
문 대통령이 외로운 진짜 이유[오늘과 내일/이승헌]법원이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효력 정지 결정을 내리자 친문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지키겠다며 일제히 들고 일어섰다. 윤 총장과 검찰에 1년 넘게 퍼부어댄 여권이지만 지금은 그 수준이 다르다. 윤석열을 언급하는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결사적이다. 그냥 두다간 문 대통령이 치명타를 입을 거라는 위기의식이 본격적으로 작동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퇴임 후 모습이 데자뷔처럼 겹쳐졌을 수도 있다. 친문들의 이런 심리는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25일 페이스북에서 총체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대통령께서 외롭지 않도록 뭔가 할 일을 찾아야겠다. 담벼락에 욕이라도 시작해보자. 다시 아픈 후회가 남지 않도록….” 문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대통령이 외로운 건 좋지 않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다. 주요 정책 결정과 정치적 판단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창조적 휴식을 위한 자발적 고독과 정치적 위기에 몰린 결과로서의 외로움은 전혀 다르다. 문제는 어떻게 대통령을 외롭지 않게 하느냐에 있을 것이다. 몇몇 친문 의원들은 청와대로 가서 문 대통령이 좋아한다는 도수 높은 ‘빨간 뚜껑’ 소주나 금정산성 막걸리라도 한잔해야겠다고 한다. 많은 강성 지지자들은 인터넷과 모바일에서 ‘디지털 재인산성’을 쌓아서 ‘우리 이니’를 지키겠다고 한다. 원조 친문 인사들이 다시 청와대에 입성해서 관료부터 장악해야 한다는 말도 들린다. 윤석열 탄핵론도 이런 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심기 경호류의 방법은 문 대통령을 세상과 멀어지게 하고 결과적으로 더 외롭게 할 수 있다. 문 대통령도 사람인지라 윤 총장에게 잇따라 원투 펀치를 맞은 상황에서 친문이라는 정치적 팬덤의 품이 따뜻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잠시일 뿐,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는 감각을 마비시킬 수도 있다. 열성 팬들의 함성에 싸여 있던 아이돌 가수가 팬덤이 사라지고 화려한 조명이 꺼지면 더 지독한 외로움에 빠진다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대통령이 외로워지는 게 두렵다면 끼리끼리 말고 오히려 밖으로 눈과 귀를 열도록 해야 한다. 지금 국내외 주요 이슈에 대한 대통령과 청와대의 대응을 보면 종종 인지부조화에 가까운 현실 인식을 드러낼 때가 있다. 코로나19 일일 신규 확진자 1000명이 뉴노멀이 됐는데도 K방역을 외치는 건 거친 현실을 피해 자신만의 세계에 외롭게 똬리를 트려는 것이다. 대북전단금지법은 글로벌 이슈를 친문들과 여권 내부 논리에 따라 남북 간 문제로만 인식하려다 국제적으로 외톨이가 되어버린 대표적인 사례다. 문 대통령이 코로나 사태 이전처럼 자주 해외 순방을 나갔다면 지금 국제사회에서 간단치 않은 고립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됐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여권에서 일고 있는 인적 쇄신론은 문 대통령에게 임기 말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장관과 청와대 참모들은 대통령이 세상을 접하는 눈과 귀다. 이들이 제대로 해야 세상에 대처할 수 있다. 임기 초도 아닌 만큼 무슨 진정한 변화의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인사도 바라지 않는다. 누구나 예상 가능한 인사나 대통령 심기만 잘 맞출 핵심 측근 말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인사 한두 명만이라도 새로 들이면 달라질 수 있다. 외로운 친문의 갈라파고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문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이승헌 부국장 ddr@donga.com}2020-12-29 03:00
이 정도면 대통령비서실장 진공 상태다[오늘과 내일/이승헌]현재 문재인 정부에서 향후 거취가 가장 불분명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일 것이다. 수개월 전부터 정치권에서 후임에 대한 하마평이 거론됐으나 아직까지도 누가 후임으로 청와대에 들어가는지 분명치 않다. 그러다 보니 비서실장 교체 필요성은 제기됐는데 정작 바뀌는 건지 안 바뀌는 건지, 가장 기본적인 사실관계마저 알기 어려운 수준이다. 지금까지 노 실장 후임으로 거론된 사람은 우윤근 전 주러대사, 최재성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 등이다. 우 전 대사는 부인의 반대가 심해 비서실장을 고사했다고 하는데 정작 대통령특사는 수락해 19일까지 러시아에 머물 예정이다. 한-러 수교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문 대통령 친서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전달한다고 하니 “비서실장 맡기 전 연막을 피우는 것 아니냐”며 헷갈려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최 수석은 본인이 비서실장직에 의욕을 보이고 있는데, 정작 문 대통령 주변에선 “정무수석 후임도 마땅치 않은데…”라는, 다소 온도차가 있는 말이 들린다. 유력한 ‘마지막 비서실장’ 후보였던 양 전 원장은 여전히 손사래를 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친문 핵심인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같은 ‘부산파’의 맏형 격이자 지금은 여행업을 하고 있다는 이호철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을 설득하고 있다는 말까지 들린다. 장관 하마평도 이 정도로 어지러운 적이 없었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국정의 2인자 자리를 놓고 왜 이런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문 대통령이 비서실장 인사에 대한 확실한 메시지를 발신하지 않은 게 가장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노 실장을 바꿀 건지, 유임시킬 건지, 이도 저도 아니면 언제까지만 쓰겠다는 건지에 대한 인사권자인 문 대통령의 생각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죽도 밥도 아닌 상황이 장기화되면 대통령비서실장에게 힘이 실리지 않고 국정 혼란이 더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유임이 불분명하고 곧 교체될 것이라고 수개월째 이야기가 나오는 사람에게 어떤 공직자나 청와대 직원들이 제대로 보고할까. 노 실장의 직무 역량과 무관하게 대통령비서실장직 자체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각종 고위급 공무원 인사를 총괄하는 인사추천위원회의 위원장이 바로 대통령비서실장이다. ‘추미애-윤석열’ 갈등 처리와 내년 2차 개각 등 조율할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필자는 문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최근 한국갤럽 등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이는 이유 중 하나도 진공 상태에 가까운 대통령비서실장의 흐릿한 존재감이라고 본다. 최근 노 실장이 문 대통령에게 무게감 있는 고언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정치권 인사는 거의 없는 편이다. 많은 사람들이 문 대통령의 독단적 국정 운영과 안일한 상황 인식이 문제라며 이를 바꾸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는 관성적 주장에 불과하다. 그리 바꾸라고 해도 꿈쩍도 않던 사람이 왜 스스로 임기 말에 유턴하겠나. 차라리 이보다는 대통령에게 뼈아픈 조언도 하고, ‘코로나 축구 모임’으로 논란을 일으킨 최재성 수석이나 억지성 브리핑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강민석 대변인류의 참모들을 다잡을 수 있는 비서실장을 임명하도록 촉구하는 게 그나마 약간의 변화라도 기대할 수 있다. ‘막장 국정’ 지켜보느라 피로감이 극에 달한 국민을 위해서라도 대통령비서실장이란 자리를 이리 방치하면 안 된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2020-12-15 03:00
강경화, 이인영으로 바이든 외교팀 상대할 건가[오늘과 내일/이승헌]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첫 국무장관 후보자인 토니 블링컨 하면 유독 한 컷의 사진이 떠오른다. 2016년 국무부 부장관 시절 방한했을 때 한 식당에서 ‘빨간 순두부’를 먹는 장면이다. 보기만 해도 매운 순두부를 왼손으로 뜨며 웃고 있었다.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난 블링컨은 일 때문에 한국의 ‘지정학적 특성’은 잘 알았어도 한국 문화는 잘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도 매워할 음식을 한국에 왔다고 태연하게 먹었다. 크리스토퍼 힐, 캐슬린 스티븐스 같은 전임 주한 미대사들도 이곳에서 순두부를 먹었지만 이들은 한국에서 몇 년씩 산 사람들이었다. 한국 음식에 대한 적응도가 같을 리 없다. 필자는 이 사진을 보면서 블링컨이 온화한 인상과는 달리 독종 외교관이라는 걸 느꼈다. 블링컨이 순두부 먹고 사진까지 찍힌 게 단지 ‘K푸드’를 너무 사랑해서였겠나. 자국 이익을 위해서라면 낯선 음식을 먹는 장면을 연출할 수도, 거꾸로 밥상을 뒤엎을 수도 있는 게 국제 외교 무대의 생리다. 실제로 블링컨이 대선 과정에서 밝힌 것만 봐도 우리 정부가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문재인 정부가 요구했던 대북제재 완화와 관련해 지난해 9월 CBS 인터뷰에서 “북한을 쥐어짜 협상 테이블로 나올 수 있도록 진정한 경제 압박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종전선언 등 문 대통령의 ‘대북 위시 리스트’와도 상충되는 말이다. 한미동맹을 돈으로 바꾸려 했던 트럼프와 대척점에 있다고 해서 블링컨에게 순두부 먹을 때의 낭만이나 선의(善意)만 기대하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블링컨을 전면에 내세운 바이든 외교팀을 상대하는 우리 진영 대표 선수들은 서훈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해 강경화 외교부 장관, 이인영 통일부 장관 등이다. 눈치가 비교적 빠른 서 실장은 그렇다 치자. 강경화-이인영 2인조의 최근 언행을 보면 과연 이들이 블링컨 같은 프로페셔널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에 가려서 그렇지, 이인영 장관의 최근 발언은 그에 못지않게 심각하다. 지난달 23일 연평도 포격 사건 10주년 날에 삼성 등 재계 인사들을 호텔로 불러 “남북 경협 문제는 예상보다 좀 더 빠르게 시작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가 국무부가 “모든 유엔 회원국은 안보리 제재 결의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고 사실상 반박하는 일이 벌어졌다. 국무부는 이미 바이든 새 행정부에 레이더를 맞추고 있다. 이 장관이 국회의원 신분이라면 전대협 의장 시절의 추억에 젖어 우리 민족끼리를 외쳐도 상관할 게 아니지만 장관으로서 국무부에 대놓고 한방 먹은 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강 장관은 요새 자신의 리더십 한계를 공개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지난달 한 포럼에선 “외교부 장관이라는 막중한 자리에서 기를 쓰고 있지만 간혹 ‘여성이기 때문에 이런 건가’ 하는 걸 느낄 때가 있다”고 했다. 수년째 ‘패싱 논란’을 겪는 강 장관의 심리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현직 외교 수장이 공공연히 신세 한탄하고 다니는 모습을 주변국들이 도대체 어떻게 보겠나. 워싱턴의 한 외교 소식통에게 이들 상황을 전했더니 “그만 좀 투덜대라(stop whining)”는, 필자가 듣기에도 민망한 반응을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무부, 백악관에 새로 들어설 사람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과연 문 대통령은 ‘강경화-이인영’ 2인조를 이대로 둔 채 바이든 시대를 맞을 것인가.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2020-12-01 02:59
바이든이 文 청와대에 가져올 두 가지 변화[오늘과 내일/이승헌]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많은 게 변할 거라고들 한다. ‘ABT(Anything But Trump)’라는 표현처럼 도널드 트럼프의 4년을 다 뒤엎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자연히 동맹인 한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줄곧 트럼프만 상대해서 바이든과 그 주변을 잘 모른다. 미국 정치를 오래 관찰한 전문가들은 예상 가능한 변화 외에 간과하기 쉬운 두 가지에 주목할 것을 권하고 있다. 우선 바이든 당선은 전문가 시대의 복귀를 뜻한다. 특히 외교 이슈와 관련해선 국무부 라인의 부활을 의미한다. 트럼프는 2018년부터 3년간 김정은과 비핵화 담판을 벌이면서 오랫동안 북한 문제를 다뤄 온 국무부 인사들보다는 문외한들을 중용해왔다. 그 간판 격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트럼프 취임 전까지는 북핵을 다뤄본 적이 없다. 마이클 플린부터 지금의 로버트 오브라이언까지 극우 매파인 존 볼턴을 제외하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북핵을 몰랐다. 국무부 입김이 세진다는 것은 문 대통령에게 북핵 프로세스 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국무부의 권위는 우리의 상상 이상이다. 미 대통령 부재 시 승계 순위는 부통령-하원의장-상원 임시의장 다음에 국무장관이다. 부처 장관 중 1위다. 바이든 당선 후 북핵 해법이 트럼프식 톱다운에서 보텀업으로 변할 것이라는 관측은 북핵 문제가 국무부로 넘어갈 것이라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트럼프 시절 4년 동안 철저히 무시당한 국무부 관료들은 6자회담으로 한창 주가를 올릴 때보다 더 까다롭게 검증에 검증을 가할 것이다. 국무부의 부활은 우리에겐 카운터파트인 외교부의 역할 변화로도 이어질 수 있다. 폼페이오가 강경화 외교부 장관보다는 오히려 국가정보원장 시절의 서훈 안보실장과 거래해온 만큼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파트너의 정상화를 요구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바이든 당선은 미국식 정치 문화의 복원을 뜻하기도 한다. 그 핵심은 소통과 공감, 그리고 유머다. 30년 넘게 연방 상원의원을 지낸 바이든은 이 점에서 전형적인 미국 정치인이다. 2018년 8월 존 매케인 상원의원 영결식에 참석한 바이든은 “내 이름은 조 바이든이다. 난 민주당원이다. (그런데) 나는 존 매케인을 사랑한다”는 말로 장례식장에서 눈물과 웃음을 뽑아낸 사람이다. 2017년 1월 퇴임 전 바이든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서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깜짝 수여받았다. 그는 감격에 연신 눈물을 훔치다가도 이 사실을 미리 귀띔하지 않은 자신의 비서실장에게 “넌 해고야”라며 트럼프의 유행어를 사용해 행사장을 뒤집어놨다. 취임 후 문 대통령의 정상 외교 상대는 트럼프와 김정은이 사실상 전부였다. 김정은은 논외로 치고, 트럼프의 트위터 명령과 블랙 유머에 익숙했던 문 대통령은 뒤늦게 오리지널 미국 정치를 새로 마주해야 한다. 임기 말에 새로운 외교 무대에 데뷔하는 격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문 대통령이 바이든과의 첫 통화에서 그가 좋아한다는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의 시 구절을 인용하며 케미스트리를 시험한 건 나쁘지 않은 시그널이었다. 바이든이 정상적으로 취임한다면 문 대통령과 함께할 임기가 1년 4개월 남짓. 한미 간 산적한 이슈를 생각할 때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새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워싱턴과의 소통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2020-11-17 03:00
김종인 안철수, 일단 만나라[오늘과 내일/이승헌]향후 정국의 분수령이 될 내년 4월 보궐선거, 특히 서울시장 선거의 가장 큰 변수는 무엇일까. 여야는 물론 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꼽는 변수 중 하나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출마 여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 대표가 보수 단일 후보로 나서느냐다. 하지만 정작 안 대표는 물론이고 최소한 내년 보선까지 국민의힘 선거 전략을 지휘할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생각은 좀처럼 알기 어렵다. 안 대표는 “서울시장은 관심 없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다. 김 위원장도 안철수 서울시장론을 꺼내면 거의 대꾸도 안 하는 분위기다. 문제는 이런 반응이 100% 진심은 아닐 것이라고 사람들이 여기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는 데 있다. 실제로 김 위원장과 안 대표는 이른바 ‘안개 정치’에 일가견이 있다. 좋게 말하면 ‘전략적 모호성’이겠지만, 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 불확실성이 다른 정치인보다 높다는 것이다. 안 대표는 2011년 정치 입문 후부터 대선 출마를 놓고 막판까지 OK 사인을 내지 않다가 선거 3개월을 앞두고 출마했다. 그 후 주요 고비마다 기조나 노선이 아리송했다. ‘안철수의 새 정치’가 그 정체를 알기 어려운 미스터리 중 하나라는 농담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김 위원장은 총선 전 선대위원장 수락 여부를 시작으로 비대위원장을 맡을지를 놓고 보는 사람을 애간장 타게 할 정도의 줄다리기를 벌였다. ‘김종인이 생각하는 서울시장, 대선 후보가 누구냐’는 스무고개 퀴즈는 나온 지 수개월 됐지만 아직 여의도에서 그 답을 아는 사람이 없다.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적당한 긴장감과 호기심은 흥행을 위해 전략적으로 나쁠 건 없다. 다만 지금 보수야권 사정이 무슨 연애하듯 밀당(밀고 당기기)을 즐길 만한 여유가 없다는 데 김종인, 안철수 두 명이 내뿜는 안개 정치의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온갖 욕을 먹어가면서도 당헌 개정 투표를 밀어붙이면서 내년 보선의 불확실성을 하나하나 제거해가고 있다. 청와대는 연말 연초면 서울시장에 나서는 장관들을 정리해 길을 터줄 예정이다. 왜 그러겠나. 그만큼 보수야권에 비해 ‘정치 동물’인 여권 사람들은 내년 선거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안팎에서도 많은 사람이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서울에서 오래 의정 생활을 한 전현직 중진들도 있고, 혜성처럼 떠오른 초선 의원도 있다. 민주당을 탈당한 금태섭 전 의원을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 후보들이 과연 차기 대선판을 좌우할 서울시장 선거의 필승 카드냐고 묻는다면 김 위원장은 속 시원하게 답할 수 있나. 안 대표도 스스로에게 더 솔직해져야 한다. 두 차례 대선에 도전했던 안 대표가 성패가 불분명한 두 번째 서울시장 도전에 나서는 것 자체가 고민스러울 수 있다. 실패하면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선이 최종 목표라 해도 부족한 정치적 행정적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서울시장이 안 대표에게 이 시점에서 현실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사람이 적지 않은 사실 역시 엄중하게 봐야 한다. 내년 보선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차기 대선 열차가 벌써 출발했다. 김종인 안철수, 껄끄럽더라도 두 사람은 일단 만나야 한다. 그래서 야권의 보선 키 플레이어로서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소통하고 설명하는 게 유권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2020-11-03 03:00
제2의 이수혁 막으려면 주미대사는 청문회 거쳐야[오늘과 내일/이승헌]은퇴했어도 현직 당시 직책으로 불리는 대표적인 직업이 장군(해군은 제독)과 대사다. 예비역 장군이 아니라 장군(General), 전직 대사가 아닌 대사(Ambassador)로 불린다. 미국 등 국제무대에서 특히 그렇다. 왜 그럴까. 어느 직업군보다 분명한 역할 때문일 것이다. 군인은 총칼로 나라를 지키고, 대사는 펜과 입으로 국가의 이익을 지켜야 하는 만큼 평생 명예로운 호칭을 사용토록 허락하는 것이다. 우리도 장군, 대사의 호칭에 대해서는 이런 관례를 따르는 편이다. 하지만 대사를 놓고서는 사뭇 다른 면이 있다. 우리는 대사를 표기할 때 어느 나라에 머문다는 뜻으로 주(駐) 자를 사용한다. 하지만 미국은 주한 대사를 ‘United States Ambassador to South Korea’라고 쓴다. ‘어느 나라에 보낸다’는 의미가 강하다. 대통령의 구상을 파견 국가에 제대로 전하고 국익을 실현하라는 메시지가 명칭 자체에 담겨 있다. 미국은 대사로 지명되면 상원 인사청문회를 거친다. 주요국은 물론이고 이름도 잘 모르는 약소국에 보내는 대사도 예외 없다. 주한 미대사는 더 철저한 검증을 거치는 편이다. 현직인 해리 해리스 대사를 비롯해 마크 리퍼트, 성 김 대사 모두 상원에서 한미동맹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북핵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를 놓고 여야 가릴 것 없이 날카로운 질의응답을 주고받았다. 국민들은 이를 통해 대사의 자질을 짐작한다. 우리가 인사청문 절차가 없었다고 해서 주요국 대사, 특히 대미외교의 첨병인 주미 대사가 다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한덕수 전 주미 대사는 국무총리까지 지내고 주미 대사로 갔다. 공무원 시절에도 잘 모르는 영어 단어가 나오면 양복 안 수첩에 적어가며 익힌 영어로 미국인들을 상대했다. 직업 외교관 출신 중 가장 오래 워싱턴을 지킨 안호영 전 주미 대사는 고전 미드 ‘매시’ 등으로 익힌 유려한 영어를 무기로 서울과 워싱턴을 무난히 이었다. 어느 대사는 상원의원 보좌관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관심도 없던 미식축구 선수 이름을 외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미 대사 자리를 놓고 유독 문재인 정부 들어 이런저런 말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경제 참모인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를 첫 주미 대사로 골랐다. 거시경제 전문가인 그는 사실 한국은행 총재에 관심이 더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10월 그가 물러나자 최근 국정감사장에서 “70년 전에 동맹을 맺었다고 해서 그것(한미동맹)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은 미국에 대한 모욕”이라고 한 이수혁 대사가 뒤를 이었다. 문정인 대통령통일외교안보특보가 유력했는데 미국의 반발이 너무 심해 고른 게 이 대사였다고 한다. 필자가 특파원 시절 지켜본 워싱턴 외교가는 전쟁터였다. 주미 대사는 말이 외교관이지 양복 입은 군인이다. 방심하면 사방에서 역정보와 음해라는 총알이 빗발친다. 이 대사의 발언에 이어 한미 안보협의회의(SCM)가 ‘참사’로 끝나면서 한미동맹에 대한 우려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미국도 변해야겠지만 우리도 변해야 한다. 그러려면 주미 대사부터 직에 맞는 사람을 보내야 한다. 인사권은 대통령에게 있으니 주미 대사를 다른 주요국 대사와 함께 국회 인사청문 대상으로 포함하는 게 지금으로선 현실적인 검증 장치가 될 수 있다. 합참의장 국세청장 등도 청문 대상이니 여야가 의지만 있으면 국회법을 고칠 수 있다. 최소한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대사로 보내려는지는 국민이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2020-10-20 03:00
나훈아가 새삼 일깨워준 제대로 된 말의 힘[오늘과 내일/이승헌]가수 나훈아의 추석 연휴 공연이 아직도 화제다. 그 가운데 나훈아의 말도 있다.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KBS가 정말 국민들을 위한 방송이 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나훈아의 사이다 발언에 열광했다면 그건 메시지가 분명한 데다 무엇보다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했으면 하는 말을 오랜만에 TV에 나오는 가수가 하자 ‘의외성’이 겹치면서 폭발력이 더했다. 국내외 정치인들의 말과 메시지를 좇으며 커뮤니케이션이 정치의 ‘팔 할’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는데, 다른 분야 레전드도 마찬가지일 수 있음을 이번에 절감했다. 이번 ‘나훈아 사건’과 별개로 개인적으로 필자는 정치 리더들의 명언을 가끔 되새기곤 한다. 직업적 습관 같은 건데, 당시 상황을 담고 있어 역사책을 보는 느낌이 든다. 김구 안창호 선생 등 우리 선각자들의 말도 좋고, 미국 대통령들의 말들도 새길 게 적지 않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에게 예약되어 있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상원의원 시절인 1956년 한 연설 중 일부. 이 문장을 인용했다는 단테의 ‘신곡’에는 정작 ‘지옥의 가장 뜨거운’ 등의 표현이 없어서 과다 해석 논란도 있지만 메시지만큼은 불처럼 분명하다. 대통령 시절에도 종종 사용해서 그가 구현하려던 뉴 프런티어 정신의 상징적 표현 중 하나가 됐다. 깊은 울림의 유머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이 ‘넘사벽’이다. 1984년 재선 도전에 나선 레이건은 당시 73세로 역대 최고령 대선 후보. 선거 내내 민주당 월터 먼데일 후보는 고령을 문제 삼았다. TV 토론에서도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레이건은 “나는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이슈화하지 않겠다”고 했다. 황당해하는 사회자가 무슨 말이냐고 묻자 레이건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내 경쟁자의 어림과 경험 부족을 활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먼데일은 패배를 직감한 듯 웃고 말았다. 이보다 더 고급스러운 네거티브 캠페인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정치와 언론의 본질에 대한 통찰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따라가기 어렵다. 2017년 1월 18일, 트럼프 취임을 하루 앞두고 한 그의 마지막 기자회견은 언론학 교과서에 실릴 만하다. “여러분은 나에게 거친 질문을 해야 한다. 그래야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은 우리가 책임감을 갖고 일하게 된다.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트럼프 정부에서도) 집요하게 진실을 끄집어내서 미국을 최고의 상태로 만들어 달라.”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 후 많은 말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단연 취임사의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대목이다. 조국, 추미애 사태와 부동산 대란을 겪으며 조소(嘲笑)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당시엔 새 정부 출범의 에너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후 무릎을 치게 하는 말이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의 말은 공허하기까지 하다. 비핵화를 생략하고 종전선언을 촉구한 유엔총회 연설이나, 공무원 총살 사건에도 김정은의 사과를 ‘각별하다’며 평가한 발언 등이 대표적이다. 왜 그럴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대중과의 공감력이 떨어지는 게 가장 클 듯싶다. 이게 온전히 문 대통령 탓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청와대의 총체적인 공감력이 떨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치는 말이 쌓여 레거시를 만드는 과정이다. 현실에 대응하는 청와대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 정상이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부터 필요한 시점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2020-10-06 03:00
어느 흑인 법무장관에 대한 기억[오늘과 내일/이승헌]미국에선 장관을 ‘비서(Secretary)’라고 부른다. 우리처럼 ‘Minister’가 아니다. 각 부문을 대표해 대통령을 보좌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비서 대신 다른 이름을 쓰는 장관이 딱 한 명 있다. ‘Attorney General’로 불리는 법무장관이다. 머리글자를 따 AG라고도 한다. 미 법무부(Department of Justice)를 ‘정의를 다루는 부서’라고들 하는데, 장관 명칭만 놓고 보면 미 사회에 적용되는 법률을 집행하는 조직의 수장이라는 뉘앙스가 강하다. 검찰총장도 겸하고 있다. 법무장관의 역할에 대한 미 사회의 기대가 명칭 자체에 녹아 있다. 필자는 특파원 기간 지켜봤던 한 법무장관에 대해 강렬한 기억을 갖고 있다. 미 최초의 흑인 법무장관인 에릭 홀더.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 시작해서 2014년까지 6년 넘게 재직했다. 법무장관으로서 홀더의 진가는 법리 해석보다는 인종 갈등의 한복판에서 드러났다. 지금은 ‘BLM’이란 줄임말로도 익숙한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의 본격적인 발화점이 된 2014년 8월 미주리주 퍼거슨 소요 사태였다. 10대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이 백인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자 ‘제2의 로스앤젤레스 폭동’은 시간문제라고들 했다. 많은 사람이 미 최초의 흑인 대통령 임기에 이런 사태가 벌어질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 결국 오바마는 이례적으로 법무장관을 소요 현장의 한복판으로 보냈다. 그는 퍼거슨에 도착해서 한 식당으로 갔다. 지역사회 각 분야 흑인 대표자들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관이라기보다 10대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여기에 왔다.” 홀더는 반신반의하는 듯한 표정의 한 흑인 여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더니 “흑인들의 경찰에 대한 불신을 이해한다” “나도 흑인이라 차별을 겪어봐서 안다”고 했다. 그렇게 대학,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공권력에 불신 가득했던 퍼거슨 주민들이 가슴을 열기 시작했다. 브라운의 어머니 레슬리 맥스패든 씨는 당시 CNN과의 인터뷰에서 “홀더 방문을 계기로 달라진 게 있다”고 평가했다. 당시 퍼거슨 분위기에선 나오기 어려운 말이었다. 사태가 진정되는 데는 몇 개월의 시간이 더 걸렸다. 홀더는 퍼거슨을 방문한 지 한 달 뒤 장관직을 사임했다. 오바마와 임기 8년을 함께할 듯했던 홀더의 사임을 두고 워싱턴에선 해석이 분분했다. 공권력 총책인 홀더가 퍼거슨 사태 초기 대처 실패의 책임을 졌다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퍼거슨 사태가 더 악화되는 걸 홀더가 막아냈다는 평가에는 이론이 없었다. 오바마는 그의 퇴임을 직접 발표하며 아쉬워했다. 미 법무장관, 그중에서도 홀더의 6년 전 이맘때 일이 떠오른 건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 관련 의혹이 불거진 뒤 추 장관의 대응을 보면서다. 의혹이나 사실관계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국무위원, 그중에서도 법무장관의 정치·사회적 역할에 대해 여야, 보혁 가릴 것 없이 우리 사회가 한 번은 곱씹어봐야 하지 않을까 해서다. 당 대표를 지낸 지역구 5선 의원 출신 법무장관에게 동시대 사람들과의 공감과 소통을 기대하는 게 그렇게 과한 것인가. 법무장관 스스로 사회적 파열음의 진앙(震央)을 자처하는 사회. 당분간 협치나 공존, 사회적 치유, 이런 말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사치 아닐까 싶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2020-09-22 03:00
왜 팔순 노정객의 대망론까지 나오게 됐나[오늘과 내일/이승헌]국민의힘(옛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당초 우려와 달리 연착륙에 성공하자 정치권에서 김 위원장의 2022년 차기 대선 출마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처음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젠 여야 가릴 것 없이 나온다. 당내에선 하태경 의원,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이 공개적으로 꺼냈다. 하 의원은 “내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까지 승리로 이끌면 김 위원장은 대선 후보군 중 하나가 된다”며 구체적인 시나리오까지 제시했다. 여권 유력 주자인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도 얼마 전 그의 출마설에 대해 “그런 얘기를 바람결에 들은 적은 있다. 가능성이야 늘 있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자신의 출마설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사래를 친 바 있다. 하지만 이게 진심인지를 놓고 서로 다른 말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지난달 31일 취임 100일을 앞두고 가진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필자는 김 위원장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차기 대선의 시대정신은 뭔가. “내년 보궐선거까지만 약속하고 (비대위원장으로) 왔기 때문에 그 다음 얘기에 대해서는 말할 게 없다.” ―상황이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 않나. “난 그 약속 지키려고 한다. 나는 상황 변화에 따라 스스로를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 ―당원들이 (대선에서 당신이)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깐….” ―건강이 좋아 보이시는데…. “여기 와서 비대위원장을 하니깐 이러저러한 얘기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건 날 잘 몰라서 그러는 거다. 나는 (뭐에) 집착해서 인생을 산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떠날 시점이 언제인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차기 대선 출마 같은) 그런 얘기는 안 물어봐도 된다.” 몇 차례의 문답에도 그의 속내를 똑 부러지게 알기는 힘들었다. 노욕(老慾)이라는 일각의 인식을 부담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차기 대선과 완전히 선을 긋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몇 가지 힌트가 있었다. 우선 김 위원장은 이 문답을 하면서 유독 표정이 밝았다. 필자는 ‘대선 출마’라는 표현을 꺼내지 않았는데 김 위원장은 대선에 대해 말했다. 인터뷰 중 ‘상황 변화에 따라 스스로를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한 것도 눈에 띄었다. 사실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12년 새누리당, 2016년 더불어민주당에 이어 올해 미래통합당에 합류해 국민의힘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사에서 일찍이 없던 팔순 노정객의 대선 출마설이 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필자는 그 답을 김종인 대망론을 언급하는 보수 야권 인사들의 표정에서 찾는다. 그의 출마 가능성을 거론하는 야권 인사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씁쓸함이 배어 있는 복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기본소득제, 광주 5·18 무릎 사과 등 한 박자 빠른 김 위원장의 정치적 감각을 인정하면서도, 팔순의 원로에게 당의 재활에 이어 차기 대선 구도까지 맡길 수도 있는 보수야권의 상황 때문일 것이다. 지금 야권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원희룡 제주지사, 유승민 전 의원, 오세훈 전 시장 등은 김종인의 한 세대 아래다. 이들은 과연 팔순의 김종인만큼 현실에 제대로 발을 딛고 고민하는지, 보수 유권자들에게 정권 창출을 위한 실질적인 희망을 주고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스타일리스트’라는 지적을 들었던 한나라당 시절처럼 말로만 개혁과 혁신을 외쳤다간 유권자들은 좋든 싫든 당분간 ‘김종인 대망론’을 듣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2020-09-08 03:00
바이든 낙관론, 아직은 성급하다[오늘과 내일/이승헌]“정말 바이든이 트럼프를 이길까?” 미국 대선이 70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요즘 외교가는 물론이고 여의도 정치권에서도 가장 자주 들리는 말 중 하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임기 4년이 워낙 시끄럽다 보니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공화당 후보인 트럼프를 이겼으면 하는 바람이 은근히 녹아 있다. 실제로 바이든이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면서 민주당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하지만 4년 전 학습효과를 거론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힐러리 클린턴이 트럼프를 이길 것이라는, 더 정확히는 이겨야 한다는 미국 진보 성향의 주류 언론을 믿다가 정반대의 결과를 받아봤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정확한 판세는 어떤 것일까. 미국 정치를 오래 관찰한 전문가들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민심의 이면을 살펴볼 것을 권한다. 각종 조사에서 바이든이 오차범위 안팎에서 트럼프를 앞서는 것으로 나오지만, 반(反)트럼프 성향이 강한 미 기성 언론이 잘 전하지 않는 대목도 함께 봐야 한다는 것. 필자가 최근 조사를 분석해본 결과 ‘바이든 낙관론’은 아직 성급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코노미스트가 유고브에 의뢰해 16일부터 18일까지 미국 성인 15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표본오차 ±3.4%포인트)를 보면 ‘지금 대선이 치러지면 누구에게 투표하겠느냐’는 질문에 바이든 50%, 트럼프 40%였다. 10%포인트 차이. 그런데 질문을 ‘누가 대선에서 승리할 것으로 보느냐’로 바꾸면 바이든 39%, 트럼프 40%로 오차범위 내지만 결론이 뒤집힌다. 지지율과 당선 가능성에 대한 여론이 다른 것이다. 당선 가능성에 대한 여론을 더 구체적으로 보면 바이든 캠프가 식은땀을 흘릴 만하다. 남성 응답자는 45%가 트럼프를, 37%가 바이든을 택했다. 트럼프에 대한 비호감도가 상대적으로 더 높은 여성층에서도 트럼프가 36%, 바이든은 41%였다. 미국 정치 전문가들은 이번 대선의 최대 관건 중 하나로 적극 지지층들의 투표 참여를 꼽는 데 큰 이견은 없다. 코로나19 사태 한복판에서 누가 위험을 무릅쓰고 투표장에 나오느냐는 것. 이와 관련해 최근 선거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특정 후보에 대한 열정 지수(enthusiasm score)’라는 독특한 지표를 볼 필요가 있다. 미 ABC방송과 워싱턴포스트가 12일부터 15일까지 미 성인 1000명을 상대로 진행한 조사(표본오차 ±3.5%포인트)의 지지율 추이는 바이든 54%, 트럼프 44%로 여타 조사와 비슷하다. 하지만 ‘열정 지수’를 놓고서는 두 후보의 희비가 엇갈린다. 바이든 지지자 중 ‘바이든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느냐’고 물었더니 절반이 안 되는 48%가 ‘매우 열정적’이라고 답했다. 트럼프 지지자는 65%가 ‘트럼프를 매우 열정적으로 지지한다’고 했다. 최근 미 대선 투표율이 하락세인 점을 감안하면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의 결집력은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미 대선 투표율은 2016년에 56.9%로 2008년(62.2%), 2012년(58.6%)에 이어 계속 하향 추세. 바이든이 당선되려면 흑인, 히스패닉들이 투표장에 나와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방역 능력이 취약한 이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참여할지 현재로선 장담하기 어렵다. 미국에서 흔히 주고받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말이 이번만큼 유효한 선거도 없을 것이다. 우리 정치권은 물론이고 재계도 끝까지 상황을 지켜보는 전략적 마인드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2020-08-25 03:00
현실화되는 ‘K5’, 이게 과연 정상인가[오늘과 내일/이승헌]이 정도면 무풍지대라 할 만하다. 부동산 정책 후폭풍으로 청와대 수석들에 이어 일부 부처 장관들의 인사설이 나돌고 있지만 몇몇 장관은 굳건하다. 이 중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거의 요지부동이다. 후임 하마평조차 들리지 않는다. 같은 외교안보 라인인 통일부 장관은 이미 이인영 의원으로 바뀌었고,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후임이 검증에서 날아갔다는 말까지 들린다. 이러다 박근혜 정부의 ‘오병세’(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5년 가까이 재직했다는 의미)에 이어 문재인 정부에선 ‘K5’(강 장관이 5년 채운다는 의미)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말이 외교가에서 파다하다. ‘5년 강경화’라는 뜻에서 5G라는 표현도 나돈다. 강 장관이 2017년 6월부터 3년 2개월째 장악하고 있는 외교부는 어느덧 ‘강경화의 외교부’로 바뀌고 있다. 강 장관과 거리가 있는 사람이 외교부 주요 보직을 맡았다는 말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외교부 장관이 오래 버텨서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미국의 경우 국무장관은 대개 대통령과 4년 임기를 함께한다. 도널드 트럼프가 2018년 렉스 틸러슨을 1년 만에 바꿨지만 후임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2년 4개월째 현직에 있다. 임기 초만 해도 “얼마나 버틸까”란 말을 들었던 강 장관이 어떻게 K5라는 말까지 듣게 된 것일까. 일각에선 강 장관의 국제적 감각을 평가한다. 한 여권 핵심 인사의 전언. “국제무대에 가보면 다들 먼 산 보고 있는데, 강 장관은 물 만난 고기처럼 세련되게 대통령을 보좌한다. 외국 공기가 더 편한 것 같다.” 또 다른 여권 핵심 관계자는 “폼페이오랑 통역 없이 영어로 말하는 걸 들어본 사람이라면 강경화 욕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게 K5라는 표현이 나오는 본질적인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외교부 장관으로서 그 무게에 맞는 역할이 오랫동안 주어지지 않았고, 책임져야 할 일이 없는 상황이 장기화돼 이젠 다들 익숙해진 게 아닐까 싶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의 요구 수준에 맞게 일하는 정치적 무색무취함이 역설적으로 강 장관의 롱런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 구상의 핵심인 북핵 이슈는 청와대 국가안보실, 국가정보원이 주도해 왔다. 외교부, 통일부는 지원 부서에 가까웠다. 미사일 지침 개정,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이슈도 안보실이 주도했다. 한일 강제징용 이슈는 이낙연 의원이 총리 시절 동분서주했고, 막판에는 문희상 전 국회의장까지 나섰다. 다 외교부 몫인 일들이다. 하지만 올 하반기부터는 외교부가 지금처럼 일하다가는 큰코다치는 환경이 다가온다. 11월 미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북-미 관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같은 동맹 이슈를 진짜 마음대로 하려고 할지 모른다. 조 바이든이 당선되면 4년 만에 ‘국무부의 시대’가 부활할 것이라고들 한다. 트럼프가 일부 백악관 참모와 주물러 온 외교 이슈를 전문가 집단인 국무부가 다시 가져가 지난 4년을 재평가하게 될 텐데 그 상대는 외교부다. 여기에 강제징용 이슈는 일본제철이 한국 법원의 자산압류명령에 즉시 항고 의사를 밝히면서 다시 한일 양국의 핵심 이슈로 부상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문제는 삐끗하면 미중 양국을 한꺼번에 건드릴 수 있는 사안이다. 환경이 이런데도 강 장관의 외교부는 별 변화가 없고 K5라는 말이 계속 이어진다면, 그건 정상이 아닌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2020-08-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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