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승헌]어쩌다가 한동훈 어록까지 등장하게 됐나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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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출신 장관에게 말까지 뺏긴 한국 정치
이대로 가면 정치의 실종 넘어 종말 현실화

이승헌 부국장
이승헌 부국장
요새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어록이 화제다. 주요 현안마다 내놓는 특유의 ‘똑 부러지는’ 화법에 열광하는 사람도 있다. 24일에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대장동 특검 주장에 대해 “수사 당사자가 쇼핑하듯 수사 기관을 선택할 수 있는 나라는 민주 국가 중 없다”고 했다. 관련 기사의 댓글창은 팬클럽을 방불케 한다. 아무리 대통령의 최측근이라고 해도 정치인이 아닌 부처 장관이 이런 센세이션을 일으킨 적은 별로 기억에 없다.

그런데 필자는 이 현상을 보면서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정치의 실종, 더 나아가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민주 국가에서 말은 원래 정치의 영역이다. 정치의 본령이 말이기 때문이다. 정치 지도자가 언어로 시대정신과 어젠다를 설정하면 국가의 각 조직이 움직이고 민간이 반응했다. 우리도 정치가 살아 있을 땐 그랬다. 공과가 있지만 3김은 다양한 어록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이끌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하나회를 척결하며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고 일갈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란 표현은 시간이 지날수록 유효한 정치 철학이다. 김종필 전 총리는 ‘정치는 허업’이라면서도 늘 맹자의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을 이야기하며 산업화가 있었기에 민주화도 가능했다고 설득했다. 3김까지는 아니더라도 6공 시절 김윤환(민정당)-김원기(평민당) 원내대표는 여백과 인내의 언어로 5공 청산 등 정치 협상의 진수를 보여줬다.

지금은 어떤가. SNS 등을 이용해 훨씬 다양한 채널로 유권자와 소통할 수 있고 정치적 행보를 할 수 있는데도 299명의 국회의원 중 누구도 좋은 의미의 화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한동훈이라는 5개월 차 국무위원이 독점적으로 국민의 귀를 잡아끄는 현 상황에 대해 여야를 떠나 정치권은 처절하게 반성해야 한다.

검찰의 대장동 수사가 본격화되자 눈물까지 흘려가며 ‘침탈’ 운운하는 이재명 대표를 위시해 일부 초선 의원의 ‘음주 빙의 질문’ 동영상이 돌고 있는 민주당은 대선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치자. 국민의힘에선 무언가를 해보려는 대신 한동훈 효과를 기대하며 그를 2024년 총선의 대표 주자로 내세우자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고 있다. 국정을 주도해도 시원치 않을 집권여당으로서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다. 115명의 소속 의원이 지금까지 유권자 귀를 붙잡는 말 하나 양산하지 못한 건 여권이 제대로 된 국정 어젠다를 설정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국민의힘 주변에선 윤석열 대통령의 상징적 브랜드가 없다며 용산 대통령실에 손가락질을 하곤 한다. 그러나 대통령실이 윤석열 표 이슈를 발굴했더라도 현재 국민의힘은 제대로 된 대국민 설명 한마디 못 했을 것이다.

검사만 했던 윤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정치 실종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모든 걸 서초동 방식으로 처리할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에 더해 정치의 영역이었던 말까지 검사 출신 장관에게 내어주고 있다. 얼마 전 만난 여권 원로는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가 지금처럼 실존적 위기를 겪은 적이 없다”며 “이런 수준의 정치인들이 개헌 같은 고차원의 정치 이슈를 토론하고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겠느냐”고 한탄했다. 그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한동훈 현상의 이면엔 정치의 종말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승헌 부국장 ddr@donga.com
#한동훈 법무부 장관#한동훈 어록#정치의 종말 현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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