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난 독재 망령… 부통령 노리는 마르코스 아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9일 03시 00분


피플파워 30년 필리핀의 오늘
‘21년간 독재’ 청산 제대로 안돼… 이멜다 등 一家 여전히 건재
“아버지 재임땐 아시아의 부국”… 암흑시대 안겪은 젊은층 파고들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1917∼1989)의 아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상원의원(59·사진)이 필리핀의 유력 차기 부통령으로 거론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30년 전 민주화를 쟁취한 이 나라에 독재자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23일 보도했다.

NYT는 수백만 명이 참가한 민주화 시위인 ‘피플 파워(People Power)’ 혁명으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난 지 꼭 30주년이 되는 날이 25일이라며 독재자의 아들이 30년 만에 다시 권력의 중심에 다가선 상황을 꼬집었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독재정치 기간은 필리핀 민주주의의 암흑 시대였다. 1965∼1986년 21년의 재임 기간 동안 3200명이 숙청되었고 4만 명이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5월 치러지는 부통령 선거에 나선 마르코스 주니어 상원의원은 23일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에서 지지율 26%로 선두다.

마르코스 정권에 항거한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아들인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대통령(56)은 “마르코스 주니어는 가족의 허물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그가 독재를 반복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없다”고 경계의 목소리를 높였다.

마르코스 주니어 의원의 부상은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필리핀 국민들이 독재 정치에 대한 공포를 망각하게 된 결과라고 NYT는 해석했다.

우선 독재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속속 선거권을 갖게 됐다. 마르코스 주니어 의원은 필리핀의 복싱 영웅인 매니 파키아오 하원의원(38)과의 친분을 내세워 젊은층을 파고들고 있다. 그는 “사람들은 계엄에 관심이 없다. 관심사는 일자리나 교통 등 지금의 문제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재 사과를 요구하는 주장에 대해 “무엇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하나”라며 “(아버지 재임 시절에) 수천 km의 도로가 깔렸고, 우리는 아시아의 부국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역사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점도 문제다. 한국인에게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독재자로, 그의 부인 이멜다(87)는 사치의 여왕으로 각인돼 있지만 필리핀 내 시각은 좀 다르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난 지 3년 만인 1989년 미국 하와이에서 숨졌지만 제대로 처벌받은 적이 없다. 이멜다 등 부정축재에 동참한 친인척 가운데 한 명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 또한 마르코스 측은 100억 달러(약 12조3650억 원) 이상을 부정축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재까지 40%만 환수됐을 뿐이다.

심지어 시가 250억 원이 넘는 귀금속과 수천 켤레의 고가 구두를 수집했던 이멜다는 지금도 “모두 합법적인 투자와 선물로 얻은 것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멜다는 1995년부터 하원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법조계에는 마르코스계 측근들이 상당수여서 향후 처벌도 기대하기 힘들다고 NYT는 지적했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경제 상황도 과거로의 회귀를 부채질하고 있다. 1965년 필리핀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87달러로 당시 한국(105달러)보다 많았다. 전 세계 77위로 일본(919달러) 싱가포르(516달러)보다는 낮았지만 아시아에선 중상위 국가였다.

하지만 필리핀은 지난해 GDP 3037달러로 세계 124위로 떨어졌다. 농업과 노동력 수출 위주의 경제 구조가 개편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위 20%가 하위 20%의 11배 소득을 가져가는 등 빈부격차도 심하다고 포브스지는 지적했다. 지난해 필리핀의 부패지수는 세계 95위로 여전히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심각하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필리핀#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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