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한드’ 덕에 행복한 임종… 나도 영화 보다 한글에 푹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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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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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개성파 여배우 아키요시 구미코의 한글-한국 사랑

한국어 배우기에 푹 빠진 일본의 중견 여배우 아키요시 구미코는 “1992년 한일 합작드라마에서 재일교포 역을 연기한 뒤 한동안 일본 내 한국식당에서 환대를 받았다”며 웃었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한국어 배우기에 푹 빠진 일본의 중견 여배우 아키요시 구미코는 “1992년 한일 합작드라마에서 재일교포 역을 연기한 뒤 한동안 일본 내 한국식당에서 환대를 받았다”며 웃었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25일 오후 일본 도쿄(東京) 한국문화원 4층의 해외 한국어보급기관인 세종학당 한글 입문반. 선생님이 ‘왜’라는 단어의 뜻을 설명하자 주부 학생들 사이에서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한국 드라마에서 숱하게 듣던 단어의 의미를 비로소 알았기 때문이었다. 학생 중에는 1970, 80년대 최고인기를 누렸던 여배우 아키요시 구미코(秋吉久美子·57)도 있었다. 수업이 끝난 후 교실 옆 사랑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만나서 영광입니다”라고 하자 한국말로 “망극하옵니다. 기자”라고 응수했다. 왜 한국어를 배우는지부터 물어봤다.

―왜 한국어를 배우나.

“엄마가 ‘겨울소나타’를 함께 보자고 강권했다. 한국 드라마에서 남자는 여자와 함께 울어준다. 일본도 옛날에는 그랬다. 1970년대부터 야쿠자 영화가 주를 이루면서 여자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는 시대가 됐다. 요즘은 여자가 앞에 가고, 남자가 여자의 뒷모습을 보는 시대가 됐지만…. 엄마는 한국 드라마 덕분에 행복하게 돌아가셨다. 5년 반 전이다. 한국 영화 ‘크로싱’을 보고 영화나 드라마 보고 운 적이 없던 내가 울었다. 사상이 아니라 가족 문제를 통해 지금 상황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한국 사람과 만나 그런 얘기들을 했더니 한국어를 한 번 배워보라고 하더라. 나는 뭘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곧 해버리는 성격이다.”

―배워보니 어떤가.

“기호로만 보이던 한글을 불과 한 달여 만에 읽고 쓰게 됐다. 이건 기적이다. 말을 배우면서 그 뒤의 역사와 문화도 보이게 된다. ‘문이 열린다’는 생각이다. 한글은 생각하는 방식이 알파벳식이고 디지털식이다. 미래적인 글로도 생각된다. 한국 사람들이 최근 세계 가운데로 뻗어나가는 것은 그런 생각 방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배우로서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생각은….

“요즘 NHK에서 방송하고 있는 ‘이산’을 무척 좋아한다. ‘이산’을 보면 그 시대의 역사와 정치를 모두 알 수 있다. 예컨대 걸어서 외국(청나라)에 간다는 게 매우 신선하다. 일본은 그런 발상이 없다. 정조의 호위무사인 박대수가 출세한 뒤에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대수야’ 하고 부르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무너졌다. 작위적이 아닌 순간에 인간의 참 아름다움이 확 나타난 것이다. 한국 드라마는 ‘맨얼굴’의 인간을 잘 그려낸다. 원수 같던 사람이 어느 날 친구가 된다. 처음엔 납득하기 어렵지만 결국 ‘인간은 그렇게 논리적이지 않다’며 수긍하게 된다. 일본 드라마는 그런 게 없다. 시마구니(島國·섬나라)여서 희로애락을 표현하지 않는 게 미덕이다.”

―좋아하는 배우가 있나.

“매력적인 역이 있다. ‘이산’의 홍국영 역이다. 이념이 있어 행동한다는 게 매우 흥미롭다. 야심이 있지만 실패하면 제로부터 다시 시작한다. ‘똥장군’을 지고도 이념이 있어 여유롭다. 그런 기백이 멋지다. 정조도 마찬가지다. 숱한 단련을 거쳐 점점 강인한 왕으로 커간다. 지금 시대는 책략만 있고 이념이 없다.”

―일본 내 일부의 혐한(嫌韓) 분위기에 대한 생각은….

“여자는 의외로 자유롭다. 다른 나라 말도 금방 배운다. 남자는 정체성을 지키려 한다. 하지만 교류를 하면서도 정체성에 자신을 가지는 게 어른이다. 좁은 마음에 자기 생각대로만 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유치하다. 이는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한일 합작 영화에 출연할 계획은….

“기회를 잡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내 이름은 구미코다. 한국말로 ‘구미가 당기는 아이’라고 한다. 호기심이 많고 한국과의 관계에도 구미가 당긴다.”
:: 아키요시 구미코 ::

1970, 80년대 일본 남자들이 ‘가장 사귀고 싶은 여자’로 꼽았던 개성파 배우. “아이를 알로 낳고 싶다”는 등 톡톡 튀는 그의 언행은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1974년 데뷔 후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고 1992년 NHK 드라마 ‘가자,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재일교포 역을 열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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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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