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의 나라]<5·끝> 더 치명적인 ‘거짓말 불감증’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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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만 이루면 만사 OK… 부정행위에도 “뭐가 문젠데?”

《 미국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카운티 처칠로드 초등학교는 4학년 학생들에게 내준 심화형 수학 문제풀이 쪽지 상단에 학생 이름과 함께 사인을 하도록 하고 있다. 바로 아래엔 ‘이 사인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학생 자신의 생각으로 풀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이라고 적혀 있다. 초등학교 4학년에게 수학 과제물을 내주면서 ‘내 생각으로 푼 것’ 을 증명하는 사인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2010년 1월 시차(時差)를 이용해 미국대학수학능력시험(SAT)시험지를 미국 동부지역 고교생에게 전달해 준 학원 강사가 적발된 사건이 발생했다. 부정행위의 수혜자는 2400점 만점인 SAT 평소 성적이 2100점대였던 우수 학생들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사건이 공개된 뒤 나타났다. 일부 학부모는 과외 학원을 찾아가 ‘왜 비싼 학원비를 받고서 우리 애한테는 문제를 안 빼줘서 손해를 입히나’ 라고 따졌다.》
위의 두 가지 사례는 ‘거짓말의 나라’ 대한민국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거짓 자체를 두려워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거짓으로라도 성과만 달성하면 ‘OK’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물론 미국에서도 거짓(hoax)과 마을(ville)이란 단어를 조합한 거짓공화국(Hoaxville)이라는 자조 섞인 신조어가 생겨났을 정도로 거짓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같은 ‘거짓말 불감증’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이제부터라도 ‘명예로운 한국’을 위한 해법을 차분히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결핍되면 선진사회에 진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프랜시스 후쿠야마).

○ 거짓말 불감증

미 SAT 부정사건은 일부 부모에게 국한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초등학교 자녀에게 부모가 대신 해준 숙제를 제출하게 한다거나 중고교생 자녀의 자원봉사 과제를 대신 해주고 ‘남는 시간에 수학문제 더 풀라’고 한다면? 또 대학입시 자기소개서를 대행업체에 맡기기 위해 지갑을 여는 부모라면?

대학가에 퍼진 시험부정 행위와 기말과제 베껴내기는 기성 질서의 부조리를 비웃는 젊은층도 허위의 문화에서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나미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장은 “이런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 잔재를 털어내는 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거짓의 생명력은 그것의 ‘단기적 만족’이 크다는 데 있다.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이보다 편한 게 없다는 것이다. 자기 평가보다는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따지는 성향이 한국인의 심리를 파고들면서 ‘엄격한 평가자로서의 자기’를 잃어버린 게 거짓을 키웠다는 분석도 있다. 진실을 아는 자신의 평가 대신에 제한된 정보를 지닌 주변인의 평판이 압도적으로 중시되면서 ‘거짓’으로 치장하려는 동기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이런 진단과 함께 “겉으로 드러나는 금전적 성취나 지위보다는 스스로 평가한 자부심의 크기를 인정해 주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진실 고백의 용기

거짓의 틀을 깨기 위해서는 진실 고백이 쉬워져야 하며, 이런 용기를 높게 평가하는 문화적 바탕도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런 결심을 높이 평가해주는 토양은 미미하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고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프랭크 케슬러 교사는 학생들의 과제물을 채점하면서 두 학생의 리포트가 아주 비슷한 사실을 발견했다. 케슬러 교사는 두 학생을 불러 어떻게 리포트가 이처럼 비슷한지 추궁했고,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공교롭게도 두 학생이 동시에 베낀 사실을 확인했다. 교사에게 불려간 두 학생 중 한 학생은 인터넷에서 베낀 사실을 인정했지만 다른 학생은 끝까지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였다고 주장했다. 학교 측에선 잘못을 인정한 학생에겐 경고 조치를 내렸지만 끝까지 표절행위를 인정하지 않은 학생에게는 퇴교 조치를 내렸다. 표절이 나쁘다는 것은 똑같았지만 거짓말을 한 데 대해선 용납하지 않는 미국 학교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미국 뉴햄프셔의 명문 사립인 세인트폴 고교의 강의실 출입문에는 ‘명예 코드’가 붙어 있다. 거기엔 “시험부정이나 표절을 하는 동료를 보면 반드시 학교 당국에 신고하라. 그것이 명예를 지키는 길이다”라는 문구가 포함돼 있다. 부정행위를 금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춘기 청소년에게 시쳇말로 ‘고자질’을 요구한 것이다. 이는 미국 사회가 미래의 리더에게 어느 정도로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는지를 가늠케 한다. 이 학교 교사는 “명예를 바탕으로 한 우리 학교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하다. 어린 학생에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요구 못할 바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 명예로운 한국을 위하여


전문가들은 부모의 역할이 더 명예로운 사회를 위한 출발점이라고 지적했다. 가정의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자녀들에게 “거짓말로 인한 잘못의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 지금 당장 더 혼나는 ‘손해’를 감내하라. 그게 훗날 달라진 너를 만든다”는 가르침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나미 원장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자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시작해야 할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부모의 역할과 함께 타인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직무를 맡은 선생님과 지식인도 적잖은 책임의식을 느껴야 한다는 시각도 많다. 황 교수는 정부건 기업이건 훈장이나 표창을 주는 기준을 새롭게 만들면 명예의 기준을 새로 세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성취에 대해서만 훈장을 줄 게 아니라 명예를 위한 행위를 인정해 주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놓고 법조계가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자유로운 의사 표현은 그 자체로 보장되어야 할 헌법적 가치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의도된 거짓이나 음모론 확산으로 한국 사회 발전의 토대가 되어야 할 ‘신뢰’를 해쳤다면 고강도 처벌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워싱턴=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  
▼ 법정 거짓말에 집유이하 선고가 82%… 위증사범 솜방망이 처벌 ▼
위증-증거인멸 10년새 2배 “법정 형량 상향조정해야”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서(盟誓)합니다.”

엄숙한 법정에서 증인 선서가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법정에 서는 증인은 누구나 선서를 해야 한다. 형법 제152조에 따라 선서를 한 증인이 거짓 진술을 하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돼 있다. 하지만 법정에서도 거짓말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 ‘거짓말 경연장’ 된 법정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해 기소되는 위증사범은 해마다 늘고 있다. 위증과 증거인멸죄로 1심에 접수된 사건은 10년 전 836건에서 2009년 1983건에 이어 지난해에는 1625건이 접수돼 10년 새 갑절 가까이로 늘었다. 검사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형사법정이 이 정도다. 서울중앙지법 민사부의 한 판사는 “민사법정은 ‘거짓말 경연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라고 자조했다.

위증사범은 늘고 있지만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쳤다. 지난해 접수된 위증죄 사건의 1심 선고 결과를 보면 집행유예 이하(재산형, 선고유예 포함) 선고율이 82%였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위증죄 처벌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법정 진술을 바탕으로 유무죄를 가리는 공판중심주의 재판이 정착하려면 거짓 증언 차단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공판중심주의가 강조되면서 법원이 위증죄를 엄하게 처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 ‘정 때문에…, 또 의리 때문에…’

법정에서 거짓이 판치는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인정과 의리를 중시하는 한국적 정서를 꼽는다. 신에 대한 선서나 서약위반을 중대한 범죄로 보는 기독교적 전통이 있는 영미권 국가와 달리 한국인은 선서를 하고도 지인을 위해 거리낌 없이 거짓 증언을 한다는 것이다. 인천지검은 지난달 20일 레미콘 기사인 직장 동료끼리 다투다 전치 8주의 중상해가 발생한 사건에서 동료를 감싸주려 법정에서 위증을 한 혐의로 권모 씨 등 8명을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폭행 혐의로 기소된 동료 전모 씨의 부탁에 단체로 “전 씨가 동료를 때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허위 증언을 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위증죄 처벌 규정도 위증죄가 만연하는 한 원인으로 지적됐다. 일본은 위증죄를 저지른 경우 3개월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독일은 1년 이상 징역이다. 고소사건이 많아 위증도 자연스럽게 늘어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민사사건을 형사사건화하는 등 고소·고발을 남발하다 보니 위증을 하는 경우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위증을 막으려면

법조계에서는 법정에서 거짓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위증죄에 대한 법정형량을 상향 조정하는 등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처벌에 앞서 위증을 예방할 수 있는 사법제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신동운 서울대 법대 교수는 “느슨하게 진행되는 재판에서는 피고인이나 증인이 입을 맞춰 위증할 여지가 크다”며 “집중 심리제를 통해 위증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증인신문 방식을 개선해 유도신문 때문에 증인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증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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